(4) 이삿집 센타 운영 - 운수업 기름밥 - 운전면허증 획득
대학교 2학년 2학기부터는 캠퍼스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었다. 아버님이 친척 아저씨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서 삼륜차(기아마스타) 사업에 투자를 하셨다.
교직에 계신 아버님은 시간이 나지 않아 나로 하여금 운영 관리를 부탁하셨다. 나는 매일 저녁 이문동 외대 캠퍼스에서 이사짐 센타 사무실이 있는 화양리(송정동)까지 출근하여야 했다.
나는 삼륜차 2대와 주차장 운영을 관리하였다. 함께 일하시는 배차계 아저씨와 기름밥을 먹고 있는 운전기사 20명을 매일 상대 하다 보니 거친 세상의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운전기사들이 예비군 훈련을 하는 날이면 대리 기사를 구하여야 하는데 그 당시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1969년 세종자동차학원에 등록하여 운전 면허증을 취득하고 한 달에 2번 삼륜차를 몰고 각종 자재, 이삿짐 등을 운송하기도 하였다. 교통 경찰관들은 우리의 상전이었다.
매달 고정적으로 상납하지 않으면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특히 사이카 교통 경찰관은 조폭 두목 같았다.
어느날 교통경찰관이 너무 심하게 요구하자, 순순한 대학생인 내가 너무 심하다고 항의하며, 앞으로 계속 무리한 협조요구를 하시면 서울지점 교통담당 부장 검사인 우리 매형에게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그 후 경찰과의 관계는 좋아지게 되었다. 권력이 무엇인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파수꾼 봉사자가 되어야 핳 경찰관이 국민의 피와 땀의 댓가를 강탈해 가는 것인지? 마음이 아팠다.
69년 10월 24일 새벽에는 우리 삼촌과 함께 논산에서 배 상자를 가득 싣고 오다가 기사가 조는 바람에 고속도로에서 전복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잠을 재우지 않고 기사에게 무리하게 운행을 종용한 결과이었다. 운수사업은 운이라고 했다. 안전을 지키지 않으면 행운이 사라진다. 욕심도 많으면 불행이 다가온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그 당시 라면 값이 20원이었는데 아버님은 나에게 수고비 및 교통비조로 매일 200원을 주셔서 대학생활을 비교적 풍족하게 지낸 것 같다.
대학생활과 삼륜차 사업을 병행하다보니 하버드대학 갈 생각은 깜박 잊고 4년이 지나 졸업을 하게 되었다. 군대는 특수외국어인 러시아를 구사 하는 ‘국군발전사령부’로 가기로 예정되어 졸업 후 1972년 6월 말 논산 훈련소에 입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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