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이석원 기자] 삼성전자는 1983년 도쿄 선언을 계기로 가전제품 제조업체에서 반도체 생산으로 주력 상품이 전환이 됐다.
이는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1983년 일본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겠다고 선언한 것인데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2차례 석유 파동’과 ‘경영권 승계의 문제’ 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병철 회장이 도쿄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두 번의 석유 파동
1970년대 삼성전자는 백색가전 사업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이 발생해 위기를 맞았다.
제1차 석유 파동은 세계 경제에 단기 및 장기적으로 많은 영향과 충격을 초래했다.
대한민국의 경우, 19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은 1974년 24.8%로 수직 상승했고, 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졌다. 무역수지 적자 폭도 크게 확대(10억 달러→24억 달러)됐다.
1975년에 이르러 성장률은 6.5%로 더 떨어졌고, 물가는 24.7%의 고공비행을 이어갔다. 후 폭풍은 2년간 지속됐고, 1976년에서야 비로소 경제는 정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이 발생해 또다시 삼성전자는 어려움을 겪었다.
심지어 대내적으로 10·26 사건과 1980년 정치 혼란이 겹치면서 1980년의 실질성장률은 경제개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2.1%)를 기록했다. 물가상승률은 무려 28.7%에 달했고 실업률도 5%를 넘어섰다. 2차 오일 쇼크 역시 꼬박 2년간 한국경제에 치명적 충격을 주었다.
이런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을 경험한 이병철은 우리나라의 취약한 경제체질을 실감한 후, 반도체 사업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경영권 승계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3남인 이건희 회장은 애초 우선 경영 승계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큰형 이맹희 회장, 작은형인 이창희 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경영 승계 구도에서 밀려났다.
이맹희 회장은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66년 경영에서 물러난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섰으나 부친에 실망을 안겼다.
이창희 회장은 박정희 정부 시절 삼성과 부친의 비리를 고발한 탄원서를 청와대 등에 제출한 사건으로 눈 밖에 났다.
큰형, 작은형의 경영 구도 탈락에 따라 이건희 회장은 자연스럽게 후계 구도에 올랐다.
게다가 이건희 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판단에 공감하고 반도체 사업에 열의를 보였다.
당시 반도체 관련 전문가와 사업가들조차도 반도체 사업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삼성 임원들 역시도 반도체 사업에 대해 위험한 선택이라며 완강히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오히려 당시 부도가 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기를 건의하며 반도체 사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에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고 1983년 반도체 사업진출을 공식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