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창업주 고(故) 유일한 박사
유 박사는 1894년 12월 13일 9남매 중 장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나, 아홉 살 어린 나이에 홀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고교 시절 미식 축구부에서 활동했을 정도로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보유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에 입학한다. 1922년 대학 동창과 동업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를 설립한다. 이를 운영해 어느 정도의 사업자금이 마련되자 미국의 사업체와 재산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영구 귀국한다. 당시 유 박사의 미주 독립운동 동반자였던 서재필 박사는 유 박사에게 작은 선물을 줬는데 바로 서 박사의 영애가 직접 만든 ‘버들표 목각품’이었다. 그것은 “버드나무처럼 민족이 편히 쉴 수 있는 큰 그늘이 되어라”라는 의미로, 향후 ‘유한양행’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1926년 유 박사는 의약품의 수입과 판매 제조를 위해 서울시 종로2가에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을 창립한다. 유 박사는 생전에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사회와 종업원의 것이다”며,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배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기업의 이익은 첫째, 계속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창출하고 둘째,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한다”고 강조했다. 1971년 향년 75세로 사망한 유 박사는 유언장을 통해 장남 유일선 씨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는 유언과 함께 유일선 씨의 딸이자 자신의 손녀인 유일링(당시 7세) 양의 학자금으로 1만 달러만 남겼다. 딸 유재라 씨에게는 오류동 유한 중고교 구내이자 그의 묘소가 있는 5000평의 땅을 상속했다. 그나마 이 땅도 ‘유한동산’으로 꾸미고 유한 중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해 ‘젊은 의지’를 죽어서도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처음의 역사를 써나간 유한양행
유한양행이 걸은 95년 기업 역사는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유한양행은 일제시대 결핵치료제, 항생제 등 필수 의약품을 출시하며 ‘최초의 서구적 제약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당시 외국 의약품의 수입에만 의존할 수 없다고 판단해 1933년 안티푸라민의 생산을 필두로 구충제, 피부병약을 제조, 판매하기 시작했다. 1936년에는 본격적으로 제약공장과 실험연구소를 건립하고 회사 형태를 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이때부터 유 박사는 ‘기업은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신념을 갖고, 공로주 형태로 회사 주식을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또 1937년부터 해외지점을 통해 중국 각지와 멀리로는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위장약, 구충제, 결핵치료제를 수출했다. 1960~70년대 유한양행은 고속 성장기를 거쳐 장수의 기틀을 마련했다. 1962년에는 외국의 유명한 제약회사들과 기술제휴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했고, 제약업계로서는 처음으로 기업공개를 단행하고 주식을 상장해 경영의 합리화를 기하였다. 특히 1971년 창업자 유 박사 타계 시 유언을 통해 갖고 있던 유한양행 모든 소유주식을 공익법인인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1976년 재단법인 유한재단과 학교법인 유한학원으로 분리)’에 기증하면서 직원들의 높은 신뢰를 받는 기업으로 거듭났다. 유한양행은 1998년과 2002년 2차례에 걸쳐 국내 상장기업 및 제약업계에서 최초로 임원뿐 아닌 전 직원에게 스톡옵션을 실시한 바 있다. 2013년 제약업계 매출 1위 기업으로 올라선 유한양행은 2014년 업계 최초의 매출 1조 원을 달성했다. 이렇게 유한양행은 제약업계를 선도하는 선진적인 경영을 내세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제약기업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