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했던 부분, 조세제도
작황의 손결에 따라 세금 부과
당시 조선시대 조세제도는 관리나 토지 주인이 직접 농작의 상황을 조사해 보고하면 작황의 손결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매년 모든 백성의 작황을 살피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관리와 토호 양반들의 부정부패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새로운 조세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었고, 세종대왕이 고안한 것이 바로 국민투표이다. 여러 해 수확량을 합쳐 평균을 내서 세금의 정도를 결정하는 방식을 취하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조세제도가 전답 1결마다 조세 10말을 거두게 하되, 평안도와 함길도만 1결에 7말을 거두게 하는 방식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조세 제도를 실시하기 전에 백성들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정 시대에 백성들의 의사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진보적이면서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국민투표 실시
이에 관료들이 노비, 여자, 어린이를 제외한 백성과 관리를 대상으로 호구에 등록된 조선의 총인구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17만 2천806명을 대상으로 국민투표를 실시햇다. 조사 결과 57.1%라는 찬성이 나왔고, 반대는 42.9%가 나왔다. 찬성이 다소 우세하게 나온 것이다. 찬성하는 쪽은 비옥한 땅을 가진 사람들이고, 반대하는 쪽은 척박한 땅을 가진 지역이었다. 결국 관리를 계속 파견하고 조정 내에서 끊임없는 토의를 하면서 새로운 조세제도를 만들었다. 그것이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이었다. 즉,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눈 것이 전분6등법이고, 후확량의 풍흉에 따라 연분9등법이 된 것이다.전분6등법·연분9등법
이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을 시행하기까지는 17년이 넘어서야 했다. 하지만 이것도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했다. 전국으로 걸쳐 확산된 것은 1489년 성종 20년에서야 됐다. 일각에서는 여론조사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하는데 여론조사의 성격보다는 국민투표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여론조사는 여론의 동향을 물어서 정책에 참고를 하는 수준이지만 국민투표는 정책의 결정을 국민(백성)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세종대왕은 새로운 조세제도를 만들었지만 그것을 실시하는 것 여부를 백성에게 맡겼기 때문에 여론조사가 아닌 국민투표라고 할 수 있다. 세종대왕 시대 만들어진 조세제도는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조세제도가 됐다. 이런 이유로 다른 나라에 비하면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이 덜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평가다.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중국이나 일본의 백성에 대한 수탈이나 서양에서의 평민에 대한 수탈과 조선시대 백성의 수탈은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중국은 시도 때도 없이 민란이 발생했고, 그 민란이 결국 나라를 뒤집고 새로운 왕조를 만들었다. 일본 역시 사무라이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다는 것이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서양의 경우 수탈이 엄청 심하면서 결국 자유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고, 프랑스 대혁명 등이 발생했다. 이런 이유로 세도정치까지 평민들의 반란 즉 민란이 발생하지 않았다. 임꺽정이나 장길산 등등이 있었지만 ‘도적’ 수준이지 민란을 일으킨 수준이 아니었다. 세도정치까지 민란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도 세종대왕이 만든 조세제도가 조선시대를 관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도정치 당시 삼정의 문란이 발생하면서 결국 민란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역사학자 중 일부는 조선시대가 5백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세종대왕이 만든 조세 제도 때문이 아니었겠냐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세종대왕이 우리나라 최초로 실시한 국민투표에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