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광주광역시가 광주 출신 작곡가 정율성을 기념하기 위해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역사공원’ 추가 조성을 하겠다고 밝히자 정부와 여당이 반대에 나섰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SNS를 통해 “뛰어난 음악가로서의 그의 업적 덕분에 광주에는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며 “광주는 정율성 선생을 광주의 역사문화자원으로 발굴하고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SNS를 통해 “다 중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라고요? 돈 되는 일이면 국가정체성이고 뭐고 필요 없단 말입니까?”라고 따졌다.
정율성이란
정율성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난 ‘항일운동가’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 활동하다가 광복 후 월북했으나 6.25 전쟁 기간 중 중국에 귀화한 조선족 작곡가이다.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전주신흥학교에 입학했지만 1933년 신흥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난징으로 건너갔고, 의열단에 가입했다. 이때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을 공부했다.
의열단장인 김원봉이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으로 ‘율성(律成)’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이에 1936년 첫 작품 ‘오월의 노래’를 작곡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난징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공산당 본부가 있는 예안에 도착했으며, 193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팔로군 행진곡’(현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중국 공산당 편에서 항일운동
작곡을 하면서 1941년 7월부터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해방을 맞이하게 됐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해서 황해도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이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인재를 양성했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장을 지냈고, 인민군 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됐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으로 갔다가, 그해 12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돌아와 전선 위문활동을 전개했다. 1951년 4월 저우언라이의 요청으로 다시 중국으로 갔으며, 1956년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가 숙청되는 것을 보고 중국 국적을 얻어 정착했다.
이후 1966년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홍위병 등의 협박 등으로 시련을 겪었다. 이때 많은 악보들이 유실됐다. 1976년 베이징 근교 한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 중 심장병으로 돌연 쓰러져 사망했는데 62세이다.
사후 1988년에 덩샤오핑의 명령으로 그가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이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정식 지정되면서 복권됐다. 또한 2009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 기념으로 선정된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