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작전
[오늘 통한 과거리뷰]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작전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8.28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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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육군사관학교가 충무관 앞에 설치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이전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2018년 탄피 300kg을 녹여, 홍범도 장군을 비롯해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만들어 육사에 설치했다.

하지만 이들 흉상을 다시 이전한다고 밝힌 것이다. 그 이유는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어 생도들이 수시로 지나다니는 장소에 둘 수 없다는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했고, 1027년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다만 역사학계에서는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가입은 독립운동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홍범도 장군은 소련 공산당으로부터도 사실상 버림받아 1937년 스탈린의 연해주 조선인 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가 1943년 사망할 때까지 극장지기를 했다는 점이다.

특히 광복 이전에 사망을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거나 북한 공산주의 건설을 위해 활동한 흔적이 없다.

북한 달갑지 않게 여겼던 카자흐스탄 고려인 주민들

우리나라는 1962년 10월 25일 오늘날 건국훈장 대통령장인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에 추서됐다.

그리고 1991년 카자흐스탄이 구소련에서 독립되면서 김영삼 정부가 유해 봉환을 추진했다. 당시 남북한 대사관 사이에는 외교전까지 벌어졌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추진한 것은 북한이 앞섰기 때문이다. 다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회에서 거부했다.

북한이 카자흐스탄에 학교를 세우고 교사들을 파견하고, 고려인 예술단 등을 평양에 초청했지만 카자흐스탄 주민들은 냉랭했다. 그 이유는 카자흐스탄 고려인 중 광복 이후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으로 귀환했지만 김일성 독재 정권 구축 과정에서 숙청되면서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귀환한 고려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카자흐스탄이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했기 때문에 소련의 위성국가인 북한에 대해 달갑지 않게 여겼다.

김일성은 홍범도 장군 업적 부정

여기에 김일성은 자신의 항일업적을 내세우기 위해 봉오동 전투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홍범도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고 배척했다는 소문까지 이어졌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에게 홍범도 장군은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에 홍범도 장군을 부정해왔던 북한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런 북한이 느닷없이 홍범도 장군이 평양이 고향이기 때문에 유해 봉환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별로 달갑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여기에 1997년 5월 우리나라 국가보훈처와 기업들은 홍범도 장군 흉상 주변에 3개의 기념비를 건립하고 공원 묘역을 단장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2021년 8월 12일 청와대는 카자흐스탄 대통령 토카예프의 방한과 연계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되어 있는 홍범도의 유해를 모셔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유해 봉환을 위해 당시 국가보훈처장 황기철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했고, 해당 특사단에 배우 조진웅도 동행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 유해를 실은 군 수송기가 서해방공식별구역에 진입했을 때 봉환용 기체로 KC-330 시그너스 1호기가 투입됐다.

호위기로는 F-15K, F-4E, F-35A, F-5F, KF-16D, FA-50 등 대한민국 공군이 운용하는 모든 종류의 전투기가 출격하여 최고의 예우를 했다. 아울러 우리 영공에 진입했을 때 플레어로 예포까지 쏘면서 극진히 예우했다.

봉환 후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관에 유해를 임시 안치하고 국민 분향소를 열어 16일과 17일 양일간 국민 추모 기간을 보냈으며 2021년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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