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약탈은 폭력을 써서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행위를 말한다. 약탈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현대 이전까지도 전쟁 속에서 수많은 약탈이 자행돼 왔다. 그리고 약탈이 전쟁의 한 형태 중 하나였다.
현대적 의미로 약탈은 비이성적이고 비인격적이며 비인간적이지만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 까지 약탈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현대에서 적군이 쓰던 물건을 가져가는 전리품은 약탈과는 별개의 개념이다.
병참 확보의 어려움
전쟁에서 약탈을 허용하는 이유는 ‘병참’ 확보의 어려움이다. 통상적으로 수십km에서 수천km 거리의 지역을 점령하려고 군대를 출진한다는 것은 병참의 거리가 길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100만 대군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병참군대가 거의 전부를 차지할 정도로 병참 문제는 전쟁에서 가장 큰 숙제이다.
그 숙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현지조달 즉 약탈을 하는 것을 일정 부분 허용했다. 또한 약탈은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 수단이 됐다.
고대 로마의 군인은 ‘자유민’이었다. 그들은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나면 사비를 들여서 무기를 구매하고 전투에 임했다. 그들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농사가 잘돼서 풍년을 이루면 되지만 또 다른 돈벌이 수단이 다른 지역을 점령해서 약탈을 하는 것이었다. 그 약탈에는 사람의 약탈도 포함돼 노예 매매를 통해서 부를 축적해 나가기도 했다.
로마 군대가 시기가 지나면서 직업군인으로 채워지지만 고대 로마 군인만 해도 자유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월급이 없었다. 그들이 유일하게 부를 축적해나가는 방법은 바로 약탈이었다.
다만 약탈을 금지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약탈을 자행할 경우 다른 지역을 공격했을 때 오히려 지역 주민들이 합심해서 방어에 들어간다면 그에 따라 함락의 어려움이 발생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 당시 백암성의 약탈을 허용했지만 막상 백암성을 함락하자 약탈을 자행하려고 했던 군사들에게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차마할 수 없다”면서 약탈을 금지했다. 이는 당 태종이 다른 성을 공격했을 때 지역 주민들의 저항이 거세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백년전쟁은 사실상 약탈 전쟁
중세시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은 사실상 약탈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백년전쟁은 대규모 전투가 없었고, 공정선이 더 많았다. 성을 함락하면 약탈을 자행했고, 그러다보니 넓은 지역을 점령해 나가면서 속전속결로 이뤄지는 전쟁이 아니라 약탈이 자행된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시작되고 끝나는 시점이 백여년이나 됐다.
십자군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십자군 기사단이 예루살렘을 되찾자는 ‘성전(聖戰)’의 개념으로 출발했지만 그 실상은 약탈전쟁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중동지역은 아시아와 유럽의 교역로로 유럽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명분은 예루살렘에 기독교 국가를 세우자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약탈 전쟁이었다.
절대왕정의 기반, 해적
약탈전쟁의 최전선은 절대왕정 시대 당시 해적이었다. 오스만 제국이나 영국제국, 스페인 제국 등에서는 해적을 용인했다.
당시 해적들은 자국 소속 상선은 무사 통과시키고, 다른 국적의 상선들을 약탈했다. 당시 절대왕정은 해적들의 약탈을 허용했고, 대신 해적들이 약탈한 상선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해서 다시 군함이나 상선으로 사용했다.
절대왕정으로서는 어떤 해적이 더 강하냐에 따라 해군의 위력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해적이 약탈한 상선을 개조해서 군함으로 사용하거나 상선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시대에서도 약탈이 자행됐다. 당시 국민병이라고 해서 민족주의로 무장된 군대이기 때문에 약탈행위를 허용했다.
다만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약탈할 물품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나폴레옹 군대가 패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 들어오면서 교통이 발달하고, 언론이 발달하면서 약탈에 대한 저항이 강해졌다. 만약 어떤 군대가 약탈을 한다면 실시간으로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비난을 받기 때문에 약탈이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게릴라들의 약탈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