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군 6진 개척은 단순히 군사적 점령 아니야
4군 6진은 1433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 장군이 조선군 약 1만5천명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 여진족을 토벌하면서부터 시작했다. 이러면서 4군이 됐다. 또한 1433년 김종서 장군이 이징옦, 황보인 등과 함께 함길도(현 함경도) 지방 여진족을 정벌하면서 6진을 설치했다. 4군 6진이라고 하면 무조건 군사적 침략으로 인한 점령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영토를 넓히는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진족은 언제든지 침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구적인 조선 땅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사민정책이다.4군 6진 개척의 핵심은 사민정책
4군 6진의 핵심은 ‘사민정책’ 즉 백성의 이주정책이었다. 그것은 고려시대 여진 정벌 즉 동북 9성의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윤관이 별무반을 구성하고 여진족을 몰아낸 후 동북 9성을 쌓았다. 그리고 7만 5천여호가 넘는 주민들을 사민정책에 동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주민들을 이주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이에 여진족이 계속 동북9성에 침범을 하면서 결국 동북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줘야 햇다. 그것은 세종대왕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사민정책이 필요했다. 4군 6진은 여진족이 살았던 지역에 삼남 지방(충청·전라·경상) 주민을 살게 해서 영토를 확고히 지키는 것은 물론 방어와 부세에 필요한 인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사민정책의 폐단
하지만 삼남 지방 백성을 여진족 땅으로 이주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록 고려 때보다 군사력이 상당히 커졌기 때문에 군사적 점령이 가능했다고 하지만 그 땅에 백성을 이주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각종 혜택 등을 부여하면서 백성들의 이주를 권장했지만 한겨울에 영하 30도 이상 내려가는 기온을 가진 땅에 백성들이 이주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주를 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범죄자들을 형벌 대신 4군 6진에 보내기도 했다. 또한 토지와 관직을 주고 면세도 해주는 등 각종 혜택을 부여했다. 이렇게 강제 이주를 하면서 기존 토착민들과의 갈등이 불가피해졌다. 함경도의 경우 기존 투착민도 있었지만 새로 이주한 백성들과 갈등을 보이면서 기존 토착민들이 소외를 느끼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 속에서 함경도 관리를 중앙에서 내려 보내면서 기존 토착민들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고, 새로 이주한 백성들 역시 중앙정부에서 자신들을 천대하고 있다는 불만이 쌓이게 되면서 결국 이시애의 난까지 일어났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