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자유도시
[역사속 경제리뷰] 자유도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9.19 1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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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자유도시란 중세 유럽 시대 군주 혹은 영주로부터 벗어나 코뮌에 의한 자치권을 보장받은 행정구역을 말한다. 오늘날의 ‘도시’의 개념과는 다르다. 따라서 오늘날의 관점으로 자유도시를 바라보면 안된다. 봉건영주와 농노의 관계가 아닌 일종의 도시 공동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로마가 붕괴된 이후 카톨릭이 자유도시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면서 카톨릭이 지배하는 사회가 자유도시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유도시가 발전하면서 카톨릭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신교’가 탄생하게 됐다.

고대 로마 붕괴 이후

고대 로마는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성장해나갔다. 그런 점에 비쳐볼 때 각 지방 도시에서 지방자치가 행해지면서 지방의회를 형성했고, 집정관, 원로원 등 로마시와 똑같이 선출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도시를 중심으로 퍼져 나간 상태 속에서 서로마 지역에 중앙정부가 붕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면서 각각 독립적인 국가가 됐다. 봉건 영주는 자신의 대농장 등을 관리하게 됐고, 봉건영주와 국왕은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사장과 근로자의 관계와 비슷한 관계를 갖게 됐다. 즉, 봉건영주는 언제든지 자신이 섬기는 국왕을 갈아탈 수 있었고, 국왕 역시 봉건영주를 갈아치울 수 있었다. 문제는 국왕이나 봉건영주 모두 관심을 두지 못한 지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도시였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농본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농촌이 가장 경제력이 좋았고, 도시는 경제력이 그만큼 뒤쳐졌다. 이런 도시에 관심을 둔 세력이 바로 카톨릭 교회였다. 신자들로부터 기부 받은 재정을 가진 교회는 도시 정부의 중심이 되면서 각 도시마다 설치된 주교구의 주교는 사실상 도시 영주가 됐다. 당시 주교는 선거를 통해 뽑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로마 교황이다. 즉, 로마의 주교가 교황인 셈이다.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자

중세 중반을 지나면서 점차 도시에는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시민의 증가와 더불어 새로운 도시의 생성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면서 주교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형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코뮌이었다. 도시민 스스로 조직화하면서 새로운 주체로 떠오르려고 했던 것이다. 아울러 도시에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농촌의 경제력보다 도시의 경제력이 더 커지기 시작하면서 국왕 등도 도시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도시를 지배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교’와 ‘국왕’ 그리고 ‘도시민의 코뮌’ 간의 권력투쟁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도시민의 코뮌은 때로는 주교로부터의 속박을 벗어나려고 했고, 때로는 봉건영주(귀족)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때로는 국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각 도시마다 각 시대마다 때로는 주교에 붙기도 하고, 때로는 국왕에 붙기도 하고, 때로는 봉건영주(귀족)에게 붙기도 했다. 여기에 국왕은 자유도시를 역으로 이용해서 권력을 장악해 나가기도 했다. 국왕이 도시민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함으로써 귀족들을 견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강력한 절대왕정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도시민 입장에서 과거에는 국왕에 세금내고, 주교에 세금내고, 귀족에 세금을 내야 했지만 이제 국왕 한 사람에게 세금을 내게 되기 때문에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톨릭 교회의 경우 점차 자신의 위치가 상당히 축소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동안 도시를 지배해왔던 카톨릭 교회의 권위가 점차 추락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결국 재정 수입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카톨릭 교회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도시민을 중심으로 신교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면서 종교개혁이 이뤄졌다. 도시민의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구교와 도시민의 지배권을 구교로부터 뺏어야 한다는 신교 간의 갈등은 결국 30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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