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까지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작품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는 루브르를 궁으로 개조하고, 각종 미술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프랑스로 초청해 말년을 보내게 했으며 그때 그린 모나리자를 사들여 풍텐블로궁에 보관했다. 화가의 서명이나 날짜, 제목 등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더욱이 다 빈치가 프란치스토 델 조콘도의 아내 리자(Risa)를 그린 것이라 한데서 유래하며, 모나는 이태리어로 유부녀를 뜻한다. 루이14세 때 베르사유 궁으로 모나리자를 옮겼고, 프랑스 혁명 이후 루브르가 공식 박물고나이 되면서 모나리자는 루브르로 돌아왔다. 그만큼 모나라지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다.1911년 갑자기 사라져
1911년 모나리자를 모사하기 위해 루브르를 찾던 한 화가가 모나리자가 깜쪽같이 사라진 사실을 파악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이에 프랑스 경찰은 즉각 국경을 폐쇄하고 박물관 주변을 수색해 빈 액자를 발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모나리자에 대한 관심이 크게 없었다. 하지만 경찰의 발표에 의해 사람들이 모나리자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경찰이 용의자 두 사람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절친인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였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다 빈치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모나리자는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었다. 반면 피카소는 엄청 유명했기 때문에 도대체 피카소가 훔친 다 빈치 작품 모나리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수사 끝에
두 사람은 수사 끝에 무죄로 풀려났다. 그리고 모나리자는 2년 후 이탈리아에서 나타났다. 이태라 화가 작품이기 때문에 훔쳤다는 범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는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모나리자는 2주 동안 이탈리아에서 30만명의 관람객에게 선을 보인 후 다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온다. 당시 범인은 나폴레옹이 훔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프랑수아 1세가 다 빈치를 초청해 그림을 그리게 했기 때문에 프랑스 소유가 맞다. 그런데 도난사건 이후 모나리자는 유명세를 탔다. 피카소가 훔친 그림이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모나리자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그러면서 오늘날과 같은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 만약 도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다 빈치가 그린 ‘그저 그런 그림’ 중 하나가 되지 않았겠냐는 평가도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