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소격서 철폐는 중종 시절 조광조에 의해 제기된 혁파운동 중 하나다.
조선시대 도교 의식을 행하는 정부기관으로 고려시대 도교 사원인 복원궁에 초재를 지내는 장소를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소격전만 남기고 합쳤다. 이후 세조 12년(1466년) 소격서로 개칭했다.
조광조 등 사림 소격서 혁파 요구
이후 소격서는 계속해서 혁파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바로 사림들에 의해 주장된 내용이다. 연산군 때에도 소격서는 형식적으로 혁파됐다. 하지만 초제는 그대로 거행됐다.
그러다가 중종 13년(1518년) 조광조 등에 의해 소격서가 일시적으로 혁파됐다. 중종은 조상 때부터 내려온 제도라는 이유로 소격서를 없애는 것에 반대했고, 이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숙청된 후 결국 재위 20년(1525년) 어머니(자순대비)의 간청이라는 이유로 다시 부활했다.
기묘사화는 흔히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문구가 나뭇잎에 새겨지면서 중종이 대노해서 조광조 일파를 제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소격서 혁파 문제가 제1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 이유는 소격서를 혁파하는 과정에서 조광조가 보인 ‘불충’ 때문이다. 조광조는 소격서 혁파의 명분으로 조선은 제후국이기 때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조광조는 엄연히 조선 국왕의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권위를 폄하한 것이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에게 세종과 성종도 소격서를 철폐하지 않았다고 하자 조광조는 세종대왕이나 성종대왕이 성군이었다고 해도 소격서를 폐지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답변했다.
중종 입장에서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폄훼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조광조 일파를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결국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된 배경이다.
조광조는 왜 소격서 혁파에 앞장 섰나
소격서는 앞서 언급한대로 고려시대부터 꾸준하게 내려왔지만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성리학 이념을 내세웠기 때문에 소격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결국 유명무실해지면서 사실상 철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소격서 혁파’를 내세운 이유는 조광조 등 사림이 내세운 개혁의 시발점이 바로 소격서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 사림파는 대공수미법, 노비종모법, 한전론 등 훈구파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개혁을 내세웠다. 그것은 중앙집권적 경제기반이 아니라 지방자치 형태의 경제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사림파는 중종시대부터 ‘향약’을 설치하면서 지방 농경중심의 사회를 구축해나가려고 했다.
그것의 출발점이 대공수미법, 노비종모법, 한전론 등이다.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중종에게 강력하게 자신의 개혁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고, 이에 유명무실한 소격서 혁파를 시발점으로 해서 조광조의 개혁이 이뤄지게 됐다.
다만 소격서 혁파 과정에서 조광조가 중종의 조상 즉 세종대왕과 성종을 모욕함으로써 결국 기묘사화가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