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까지는
우리나라는 해방 이전까지는 성인 영상 등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다만 성인 영상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가요가 성인 영상을 대신했다. 예컨대 ‘쌍화점’이라는 고려가요는 회회아비(아라비아 상인)이 만두를 사러 온 여인의 손목을 잡았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 남녀상열지사라면서 외면했다. 이에 춘화의 등장도 늦었다. 인조 때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인조에게 여인의 나체를 조각한 ‘춘의’를 예물로 보냈지만 가루로 부셔 버렸다. 신하들은 손으로 만질 경우 벼슬길이 막히기도 했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 ‘색욕’편에서 성욕에 바져 문란한 사람은 금수만도 못하다고 했다.군사독재 시절에는
해방 이후에 남녀 간의 관계에 관한 작품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성인 영상은 한참 뒤에나 등장했다. 1970년대나 1980년대까지는 비키니 입은 여성의 사진 등이 담긴 ‘선데이서울’ 등 잡지가 인기를 얻었다. 당시 영화는 성인 에로영화가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그 이유는 군사독재정권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성인 에로영화를 주로 제작하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사회 비판적인 영화 소재는 검열을 심하게 한 반면 성인 에로영화의 문은 넓혔다. 그러다보니 영화 제작사들은 주로 성인 에로영화의 제작에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동건설 붐으로
1980년대 들어서면서 각 가정집마다 컬러TV가 보급되고 비디오플레이어가 설치가 됐다. 이는 중동건설 붐과 3저 호황 등을 계기로 각 가정집마다 가계소득이 늘어나면서 가전제품의 보급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세운상가 등에서 이른바 ‘빨간 테이프’로 불리는 성인 영화를 판매하는 상인들이 속속 등장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었고, 각 가정마다 빠른 인터넷 속도를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성인 영화의 보급은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 다만 에로영화 등만 합법을 뿐 성기가 노출되는 ‘포르노’는 불법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