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현감에서 아산현감으로
이지함은 여러가지 기행을 했다. 1573년(선조 6) 포천현감에 임명됐지만 자신의 건의가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사직하고 물러났다. 1578년 다시 천거를 받아 아산현삼에 제수됐는데 걸인청을 만들어 노약자와 고통 받는 백성들의 구호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이 조선 경제의 현실에 대해 언급하면서 백성을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해야 할 것인지가 자세하게 적혀 있었고, 이것이 훗날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지함은 백리가 되는 고을을 얻어서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포천현삼에 있으면서 올린 상소문인 이포천시상소(莅抱川時上疏)에는 이지함의 사상이 담겨져 잇다.상소문에 적힌 내용이 뭐기에
포천현의 어려움을 상세하게 적시하면서 현실의 문제점을 타개하는 방안으로 세가지 대책을 제시했다. 제왕의 창고는 세 가지가 있음을 전제하고,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인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이 상책, 인재를 뽑는 창고인 이조와 병조의 관리를 적절히 하는 것이 중책, 백가지 사물을 간직한 창고인 육지와 해양 개발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을 하책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지함이 중점을 둔 것은 하책이었다. 상책과 중책은 실현이 어렵기 때문에 하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지함은 자원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이지함은 어업이나 상업, 수공업, 광업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 육지건 해양이건 국토에서 산출된 자원을 적극 개발, 이를 통해 국부를 증대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것이 북한파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박제가는 북학의라는 저서에서 “토정 이지함 선생은 일찍 외국 상선 여러 척과 통상해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려고 한 것도 있었다”면서 “그 분의 식견은 탁월하며 미칠 수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애민 정신이 19세기 들어와서 토정비결이 만들어지면서 책이름에 이지함의 호가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것이 정설로 점차 굳어지고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