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청조운동 그리고 YS의 골덴복
[역사속 경제리뷰] 청조운동 그리고 YS의 골덴복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12.07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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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향신문 기사 캡쳐
당시 경향신문 기사 캡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으로 제2 공화국이 탄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분열하게 되고 민주당 구파는 신민당을 창당했다. 그러면서 국민들의 실망감이 상당히 커졌다. 그리고 5.16 군사반란이 일어난 1961년 새해 1월 26일 국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신민당 소장파인 김영삼을 비롯한 3040세대 젊은 의원 18명이 저렴한 국산 ‘골덴(코듀로이)양복’ 차림으로 넥타이를 하지 않은 채 등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선한 바람이었고, 이에 ‘청조운동’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을 ‘청조회’라고 칭했다.

비싼 양복 대신 저렴한 국산 양복으로

당시 국회의원들은 값비싼 맞춤 정작을 입고 등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골덴으로 만든 값싼 기성품을 넥타이도 없이 등원하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들은 기자들에게 ‘맹약칠장(盟約七章)’을 내걸었다. 일곱 가지 맹세는 ‘대중교통 이용하기’, 요정(고급술집) 출입금지, 이권개입 금지, 선거제 개혁, 학생들의 생활혁신운동 지지, 남북통일 노력, 근로권 쟁취 등이었다. 이들 모임은 정식 명칭이 없었다. 기자들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고, 기자들은 ‘맑은 조류’라는 의미로 청조운동으로 명했고, 청조회라고 불렀다. 이들이 청조운동을 하게 된 것은 4.19 혁명 이후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생활혁신운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생활혁신운동 중 하나가 ‘양담배 금지’였고, 커피 마시지 않기 등이었다. 즉, 국산품 애용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국회의원들이 받아서 청조운동으로 승화한 것이다.

청조운동은 신당 창당 움직임으로도

청조회의 청조운동이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윤보선 대통령도 청조회 회원들을 초대해서 칭찬을 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청조운동이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다만 국산 골덴 양복이기 때문에 국내 특정회사 양복을 밀어주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조회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이에 청조회 의원들이 지방강연을 가게 되면 수백명의 사람들이 강연장에 몰릴 정도였다. 김영삼 당시 의원도 강연회를 다니면서 직선제의 열망을 체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점차 직선제를 위한 야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청조회가 막을 내리게 됐는데 그것은 바로 5.16 군사반란 때문이다. 박정희 군부세력은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1962년 3월 4374명의 정치인들에게 ‘정치활동정화법(정정법)’이란 재갈을 물려 놓았다. 이에 청조회 활동이 5.16 군사반란 이후 흐지부지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조운동과 청조회의 정신은 박정희 정권 때 야당의 정신이 됐고, 그것이 오늘날 야당 정신의 뿌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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