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영국과 홍차
[역사속 경제리뷰] 영국과 홍차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12.08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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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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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홍차는 차잎 내부의 성분이 자체에 들어있는 효소에 산화되어[3] 붉은 빛을 띠는 차를 뜻한다. 홍차 하면 떠오르는 나라가 바로 영국이다. 영국 국민의 홍차 소비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영국 국민의 홍차소비량은 1인당 1년에 4kg 정도가 된다고 한다.

캐서린이 시집올 때

영국이 중국 홍차를 처음 접한 것은 포르투칼 왕녀 브라간사의 캐서린이 시집 올 때였다. 캐서린은 영국 촬스 2세(재위 1660~1685)와 결혼하면서 중국 홍차를 처음으로 가져왔다. 다만 당시 영국 남성들은 커피를 마셨고, 여자와 아이들은 마시지 않았다. 이는 커피가 여자와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에 영국 남성들은 커피하우스라는 카페 문화를 만들어냈다. 반면 여성들은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실 수 없었고 집에서 버터밀크를 마셨다. 그런데 캐서린이 찰스 2세와 결혼하면서 홍차를 들고 오자 영국 왕실 사이에서는 홍차를 마시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특히 남성들이 커피를 커피하우스에서 마시는 것에 반감을 품은 영국 여성들이 홍차를 마시면서 일종의 성(性)대결 양상이 됐다. 영국 여성들은 거실 테이블에서 중국산 도자기 찻잔 세트로 홍차를 즐기는 것으로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남성과 대비되게 됐다. 이에 홍차는 상류층 여성의 사교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커피는 선원들이나

최고급 중국산 도자기 찻잔 세트에서 홍차를 마시다보니 영국 귀족들 사이에서 커피는 커피하우스에서 선원들이나 마시는 음료라는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영국 귀족 남성들도 커피 대신 홍차를 마시게 됐다. 그것은 자신이 소유한 값비싼 중국산 도자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집에 사람을 불러 도자기를 자랑하면서 홍차를 마시게 됐고, 그것이 영국 귀족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게 됐다. 영국은 식민지 지배 영토를 넓혀가면서 영국 귀족들은 더욱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찻잔 세트를 뽐내고 싶어 했고, 결국 영국 남성들도 홍차를 즐겨마시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귀족을 넘어 평민들에게 퍼져 나가면서 점차 영국의 대표적인 대중문화가 됐다.

재정 부담으로

문제는 영국 내에서 홍차 소비가 늘어나면서 차의 가격이 급등하고 재정이 줄어들면서 영국 정부는 18세기 당시 식민지였던 미국에서 홍차 재정의 부담을 안기려고 했다. 이에 미국인들이 저항을 하면서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했고,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벌이면서 중국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상선 역시 원활하게 운항이 되지 않으면서 중국산 차의 가격이 폭등을 했다. 즉, 영국과 청나라의 무역구조는 영국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영국은 무역적자가 심각해졌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영국은 대량의 아편을 반강제적으로 청나라에 팔아넘겼고, 결국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청나라 왕조를 무너뜨리게 됐다. 이어 1823년에 탐험가 로버트 브루스 소령이 인도의 아삼 지방에서 새로운 차나무 품종을 발견했으며, 1848년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포춘은 중국 상인(혹은 몽골 고관)으로 변장해 중국에서 차의 제조법을 알아냈다. 그러면서 영국은 인도에 본격적인 홍차 재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중국과의 무역적자가 해소됐지만 청나라는 여전히 아편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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