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상언과 격쟁은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이 ‘합법적’으로 국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것을 말하고, 민란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상언은 백성이 임금에게 직접 ‘글’을 올리는 것이고, 한문으로 쓴 문서 행태였다. 당사자가 직접 작성하고, 직접 바쳐야 하고, 본인이 직접 상언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자 특히 한자를 알고 있는 관원이나 양반 혹은 주인들이 주로 사용했다.
격쟁은 징이나 괭과리
격쟁은 임금의 외부행차 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직접 왕에게 자신의 사연을 고하는 것이다. 글을 쓸 줄 모르는 백성들이 주로 사용한 방법이었다. 원래 신문고라는 제도가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과 괴리감이 있었기 때문에 유명무실했다. 격쟁은 정조 때 매우 활발했다. 정조 시대에는 약 4400여건의 민원이 상언과 격쟁을 통해 처리됐다.
정조가 외부행차가 잦았는데 외부행차를 하는 이유가 격쟁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정조대왕은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격쟁에는 양반의 경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예컨대 신원회복 등이었다.
하지만 백성의 경우 주로 사회 경제적 비리와 침탈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토지침탈이 17%를 차지했고, 18세기 이르러 지방수령, 토호, 아문 등에 의한 토지 침탈이 심각해지자 소농민의 몰락이 가속화되면서 이들이 임금에게 하소연하기 위해 격쟁을 벌이기도 했다.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삼정의 문란에 따른 조세와 관려된 하소연이었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세 가지 수취 행정을 삼정이라 하는데 이것이 세도정치 시기에 문란해지면서 백성들의 고통이 늘어나자 격쟁도 덩달아 늘어났다.
민란으로 발전
만약 격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민란으로 이어졌다. 동학농민운동 이전까지 민란의 성격은 ‘우리 마을에 임명된 수령을 거부한다’는 차원이엇다.
이에 민란이 발생해서 관아를 점령한다고 해도 민란 백성들은 주로 아전이나 지역 유지를 폭행하거나 살해했지만 수령은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령은 임금이 임명했기 때문에 수령을 죽인다면 역모로 몰리기 때문이다. 민란을 일으킨 것은 임금에게 수령을 교체해달라는 일종의 하소연이었다.
민란 주동자들은 수령을 하옥시킨 후 관찰사에게 이를 보고할 때 수령의 탐학과 폭정에 항거할 뿐이이지 조정과 임금에 반역할 생각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 관찰사는 이를 임금에게 보고를 했고, 조정은 안핵사를 파견했다. 안핵사는 수령을 조정을 압송하고, 민란의 주도자에 대해 별도로 처벌을 내렸다. 하지만 단순가담자들은 죄를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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