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참패를 하면서 13척 이외에는 남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1년만에 80여척의 판옥선을 거느릴 수 있었다. 그리고 노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13척의 함선이 80여척으로 1년 사이에 늘어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비용이 만만치 않고, 그 비용을 삼도수군통제영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해로통행첩제도 시행
이순신 장군은 명랭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해 고하도에 진을 치고 병력 보충과 전선 건조를 위해 힘을 썼다. 고하도에는 소나무가 풍부해서 빠른 속도로 전선 건조가 이뤄졌다. 이에 고하도에서 머무는 동안 40여척의 판옥선이 만들어졌다.
이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해로통행첩제도를 시행했다.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은 조선 수군에게서 통행첩을 받아야 이동할 수 있었다. 큰 배는 쌀 3석, 중간배는 2석, 작은 배는 1석이었다. 이에 열흘 동안 거둬들인 군량미가 만여석이 됐다.
청어잡이에 나선 군선
이와 더불어 이순신 장군의 통제영은 청어잡이에 나섰다.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은 소금 채취를 하고, 질그릇을 굽고, 그리고 바다에서 물가리를 잡기도 했다. 이에 농민들과 물물교환을 해서 군량미를 마련했다.
그중 단연 으뜸이 바로 청어였다. 실제로 난중일기 곳곳에서는 청어잡이와 관련된 기록들이 있다. 예컨대 “황득중과 오수 등이 청어 7000여 두름을 싣고 왔기에 김희방의 무곡선(貿穀船·곡식을 매매하는 배)에 계산하여 주었다” 등의 기록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 청어 한 두름과 곡식 한되까지 기록했다. 통제영에는 청어잡이, 청어 건조, 청어 매매 등 병사들의 역할과 담당이 분류돼 효율적으로 운영됐다.
청어 말린 과메기도
이순순 장군은 청어를 잡아서 과메기로 만들어 전국에 판매를 했다. 전국으로 판매를 하면서 군량미를 확보하고, 해당 군량미를 통해 판옥선 건조에 나섰다. 그러면서 1년 새 80여척의 판옥선을 만들 수 있었다.
그 판옥선이 결국 노량해전에서 활약을 하면서 승리르 할 수 있었고, 판옥선은 동아시아 최강 함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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