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135년 1월 4일(음력)은 묘청의 난이 발발한 날이다. 1136년까지 고려 서경에서 이뤄진 반란을 의미한다.
승려인 지누각원사(知漏刻院事) 묘청이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 ‘금나라 정벌’을 요구하며 서경에서 일으킨 쿠데타였다.
이는 호족이 문벌귀족으로 기득권이 바뀌면서 그에 따라 개경 기득권 세력과 왕실 세력 간의 갈등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호족에서 문벌귀족으로
고려가 건국될 때 태조 왕건과 함께 한 건국 세력이 바로 지방 호족이다. 지방 호족들은 기득권 세력이 됐지만 고려거란전쟁을 계기로 현종이 중앙집권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점차 중앙귀족을 과거시험을 통해 키워나갔다.
이에 호족들 역시 과거시험을 통해 중앙정부로 진출하면서 이들은 점차 ‘문벌귀족’으로 바뀌었다.
왕의 입장에서는 문벌귀족과 경쟁을 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개성은 태조 왕건의 고향이지만 점차 문벌귀족에 의해 장악되면서 그에 따라 왕의 지역적 기반이 되지 못했다.
반면 서경은 태조 왕건이 자신의 사촌아우인 왕식렴을 파견해서 터전을 일궈나갔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왕씨 터전’이었다.
문벌귀족에 의해 장악된 개경
개경은 문벌귀족에 의해 장악됐다. 특히 신라계 문벌귀족들이 기득권을 장악해 나갔다. ‘왕’의 입장에서 이들의 존재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런 이유로 묘청을 중심으로 해서 왕실을 받쳐줄 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묘청은 서경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것이 금나라와의 갈등과 연결되면서 그에 따라 이번 기회에 개경 문벌귀족을 쓸어버리겠다는 입장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결국 문벌귀족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그에 따라 문벌귀족이 득세했고, 그것이 무신의 난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