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24년 1월 5일은 의열단 단원 김지섭 의사가 일본 천황 폭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날이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김지섭 의사는 1884년 7월 21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산현 오미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아버지 김병규와 어머니 신천 강씨 강극주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일본어를 1달 만에 익혀 상주공립보통학교(현 상주초등학교) 교사가 됐고, 독학으로 금산지방법원의 서기 겸 통역으로 일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과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하지만 의열단은 일제가 보낸 첩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 왜냐하면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그만두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기 ㄸ매ᅟᅮᆫ이다.
1921년경 단장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 내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찰서, 재판소 등을 비롯한 일제 주요 관서를 폭파하기 위해 국내로 30여 개나 되는 폭탄의 반입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간신히 빠져나와 다시 상하이로 피신했다.
제국의회에 폭탄 던지기로
의열단은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 고관들이 참석하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했는데 일본어에 능통하고 외모가 일본인과 닮은 김지섭을 일본에 보냈다.
하지만 도쿄에서는 제국의회가 무기한 휴회가 됐다. 그러자 김지섭 의사는 목표를 황거(천황의 궁성)으로 바꿨다.
1923년 당시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김지섭 의사는 충격을 받았고, 이에 의거를 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1924년 1월 5일 거사를 계획하고 폭탄 3개를 품소겡 숨긴 후 궁성 앞에서 보초병들과 싸우고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탄이 발생하면서 결국 체포됐다.
검사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후세 다쓰지가 김지섭의 변호를 맡았다고 “김지섭은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고 “폭탄이 불발했으니 불능범”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1927년 10월 무기징역을 받았고, 1928년 2월 22일 옥중에서 뇌일혈이 발생하면서 45세로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