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32년 1월 8일은 한인애국단 단원 이봉창 의사가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일본어로 사쿠라다몬 의거로 불린다. 그것은 일왕이 사는 궁문을 ‘사쿠라다몬’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침체돼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중국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를 주목했고, 이것이 1943년 카이로 회담 당시 장개석 주석이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게 됐다.
임시정부의 침체기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상해에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승만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의 탄핵과 자금 횡령 의혹, 인력 부족 및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분열, 무장독립운동과 외교독립운동의 분열 등으로 인해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러시아 지역에서는 러시아 내전이 끝나고 소련이 등장하면서 역시 독립운동 활동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일본은 만주로 진출을 하면서 중국을 점차 압박해 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총독부의 문화통치로 인해 지식인들의 변절이 있었다.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던 김구 주석으로서는 새로운 돌파구 마련이 필요했고, 이에 한인애국단을 결성했다. 한인애국단은 요인 암살, 주요 시설 파괴 등 비밀공작을 수행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중국인들의 분노가 상당했다. 그러면서 규탄 성명이 쏟아졌다. 여기에 1931년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국 내 조선인에 대한 비판 여론도 상당히 들끓었다.
이봉창의 등장
이런 가운데 임시정부에 이봉창이 찾아왔다. 임시정부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봉창을 일본인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밀정이 아닌가 의심을 했지만 김구 주석만은 계속 믿어줬고, 이봉창은 일왕을 암살할 계획을 털어놓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지만 김구 주석은 이봉창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한인애국단에 가입시킨 후 거사를 진행했다.
김구주석이 작전과 동선 전반을 직접 설계했고, 국민혁명군 김홍일 상교는 폭탄을 조달했다. 당시 상하이 군수공장 주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봉창은 1931년 12월 13일 선서식을 마치고, 12월 17일 상해를 떠나 일본으로 잠입했다. 그리고 1932년 1월 8일 도쿄 교외에서 열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호히토 일왕을 겨냥해 이봉창이 도쿄 경시청 부근에 수류탄 1개를 던졌다. 하지만 마차 여러 대 중 어느 것이 일왕이 탄 마차인지 알지 못해서 명중시키지 못했다.
경찰이 당시 이봉창을 알아보지 못하고, 옆에 있던 일본인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구타를 가했다. 그러자 이봉창은 그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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