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431년 1월 9일은 잔 다르크의 종교재판이 시작된 날이다.
잔 다르크는 서구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고, 프랑스에서는 애국주의의 상징이다. 잔 다르크 소재로 한 작품들도 많다.
이날 잔 다르크의 재판은 ‘이단재판’이었다. 흔히 ‘마녀재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마녀재판’과 ‘이단재판’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묵인 하에 잉글랜드와 친영파 프랑스 내의 귀족인 부르고뉴의 주도로 이뤄진 재판이었다.
정치적 위협 받은 샤를 7세
사실 잔 다르크가 처음 출전할 당시만 해도 샤를 7세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존재 자체가 큰 위협이 됐다. 명성이 샤를 7세보다 더 커지면서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존재 자체에 대해 불편함이 있다.
이런 이유로 샤를 7세는 잉글랜드의 잔 다르크 체포에 묵인 혹은 동조를 했다. 그리고 결국 포로로 잡혔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는 이단재판을 열었다. 포로로 취급을 한 것이 아니다. 이단재판을 연 이유는 잔 다르크가 이단으로 결정이 나면 잔 다르크를 기용한 샤를 7세도 역시 이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70여명의 이단심문단이 구성됐지만 잔 다르크의 혐의를 입증하거나 자백을 받아내는데 실패를 했다. 신학 전문가 70여명이 심문을 했지만 일자무식 시골소녀에게 밀렸다.
첫 재판은 공개재판을 했다. 그 이유는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규정해서 샤를 7세의 권위를 깎아 내리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70여명의 심문관이 패배를 하자 두 번째 재판부터 비공개 재판으로 바뀌었다.
남장 혐의 뒤집어 씌워
결국 코숑 주교는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당시에는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것은 동성애 예비음모로 보고 성경에 위배되는 종교적 범죄로 취급했다.
잔 다르크는 순결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이미 과거 재판에서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한 여성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잔 다르크 재판에서는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잔 다르크는 재판이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해서 교황청에 항소를 했지만 재판정은 이를 저지했다.
결국 남장을 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규정하고 화형에 처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화형식은 오히려 프랑스 국민의 애국심을 부추기게 했다.
그것은 샤를 7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백년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고, 프랑스라는 국가가 형성됐으며, 그에 따라 절대왕정 시대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