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위협 받은 샤를 7세
사실 잔 다르크가 처음 출전할 당시만 해도 샤를 7세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존재 자체가 큰 위협이 됐다. 명성이 샤를 7세보다 더 커지면서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존재 자체에 대해 불편함이 있다. 이런 이유로 샤를 7세는 잉글랜드의 잔 다르크 체포에 묵인 혹은 동조를 했다. 그리고 결국 포로로 잡혔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는 이단재판을 열었다. 포로로 취급을 한 것이 아니다. 이단재판을 연 이유는 잔 다르크가 이단으로 결정이 나면 잔 다르크를 기용한 샤를 7세도 역시 이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70여명의 이단심문단이 구성됐지만 잔 다르크의 혐의를 입증하거나 자백을 받아내는데 실패를 했다. 신학 전문가 70여명이 심문을 했지만 일자무식 시골소녀에게 밀렸다. 첫 재판은 공개재판을 했다. 그 이유는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규정해서 샤를 7세의 권위를 깎아 내리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70여명의 심문관이 패배를 하자 두 번째 재판부터 비공개 재판으로 바뀌었다.남장 혐의 뒤집어 씌워
결국 코숑 주교는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당시에는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것은 동성애 예비음모로 보고 성경에 위배되는 종교적 범죄로 취급했다. 잔 다르크는 순결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이미 과거 재판에서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한 여성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잔 다르크 재판에서는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잔 다르크는 재판이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해서 교황청에 항소를 했지만 재판정은 이를 저지했다. 결국 남장을 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규정하고 화형에 처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화형식은 오히려 프랑스 국민의 애국심을 부추기게 했다. 그것은 샤를 7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백년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고, 프랑스라는 국가가 형성됐으며, 그에 따라 절대왕정 시대로 접어들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