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쵸닌은 일본 에도 막부 시대 당시 상공업 계층이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사농공상의 계층 분류가 뚜렷해졌다.
쵸닌은 에도 막부 시대 당시 엄청난 재력을 자랑했지만 신분상승을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문화 소비 계층으로 떠올랐다.
에도 막부 시대 당시 쵸닌이 급상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었을 당시부터 숙명적이었다.
영지로 받은 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에도 일대를 영지로 하사받았다. 하지만 에도 지역은 염분기가 많았기 때문에 넓은 평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쌀 생산량이 적었다. 당시 다이묘의 재산력은 ‘쌀 생산량’을 기준으로 했다. 즉, 쌀 생산량 기준으로 볼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폭망’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일대를 개발해 나기 시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일본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자신의 근거지인 에도에 막부를 세웠다. 에도 시대에 막부가 위치한 일본 정치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에도 성은 쇼군의 거성(居城)으로, 에도는 막부 관청이 위치한 행정부의 주재지였다. 부요(武陽)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쇼군으로서는 한 번도 에도에 머무르지 않았다.
특히 에도만(현재 도쿄만)을 주목했다. 에도만에서 물고기를 잡아 판매를 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기도 했다.
즉, 다른 다이묘는 ‘쌀’을 중심으로 재력을 쌓아간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상공업을 중심으로 부를 축적해 갔다.
쵸닌 등장
상공업 중심으로 에도 막부가 열리면서 자연스럽게 쌀 중심의 다이묘가 몰락해가기 시작했다. 17~18세기는 소빙하기가 찾아오면서 쌀 생산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사무라이’의 지위도 격하됐다. 그것은 다이묘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다이묘가 몰락하면서 자연스럽게 상공업을 해왔던 사람들 즉 쵸닌이 사회에 부각됐다. 그들은 상공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아나갔다.
쵸닌을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부즈주아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일본 사회는 신분 상승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사회였다.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신분은 그대로이면서 이들은 정치적 발언권도 없었다.
쵸닌의 신분 상승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면서 돈을 어떤 식으로 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소비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쵸닌은 ‘예술작품’에 대한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문학으로는 우키요조시(浮世草子)가 등장이다. 말이 ‘서민소설’이지 실제로는 ‘성(性) 관련 소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야설’이다.
그림으로는 우키요에(浮世絵)가 등장한다. 물론 우키요예는 고흐와 드뷔시 등에 엄청난 영감을 준 그림이지만 엄연히 이야기하면 ‘춘화(春畵)’이다. 당시 유키요에 작품은 대부분 춘화였다. 춘화 아닌 것을 찾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종합예술로는 가부키가 있었다. 현재는 가부키가 전통문화로 취급받았지만 당시 내용들은 ‘음란’ 그 자체엿다.
쵸닌이 이처럼 ‘성인 콘텐츠’에 열광했던 것은 신분 상승 억제에 대한 욕망을 인간의 성욕으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이를 금지시켰다. 워낙 풍기문란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그러자 쵸닌을 대상으로 한 가부키는 ‘와카슈 가부키(若衆歌舞伎)’가 됐다. 즉, 어린 소녀를 내세운 가부키가 됐다. 이것을 에도 막부가 금지하자 이번에는 동성애 가부키가 나온 것이다. 결국 에도 막부는 가부키를 근절시킬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