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리뷰] 1월 17일 교황청, 아비뇽 유수 종식
[역사 속 오늘리뷰] 1월 17일 교황청, 아비뇽 유수 종식
  • 최용운 기자
  • 승인 2024.01.1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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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아비뇽 교황청 / 사진=네이버 갈무리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아비뇽 교황청 / 사진=네이버 갈무리
[파이낸셜리뷰=최용운 기자] 1377년 1월 17일은 유럽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가 종식된 날이다. 아비뇽 유수는 교황의 ‘바빌론 유수’라고도 하는데 고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에 빗댄 표현이다.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강제로 옮기게 하고 돌아가지 못하게 한 사건이다. 아비뇽 유수로 교황청은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약 70년간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생활하게 됐다. 당시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4세가 교황청과의 갈등으로 촉발된 아나니 사건으로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5세가 교황에 즉위했다. 필리프 4세의 요청으로 1308년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로 이주한 후 이듬해 아비뇽으로 옮겼다. 아비뇽 교황청은 이후 프랑스 출신으로 채워졌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교황청을 다시 옮기면서 유수가 종식됐지만 이후 교회 대분열의 시초가 됐다. 1378년 그레고리오 11세가 선종한 후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즉위했으나, 프랑스파 추기경들이 신임 교황의 선출선거인 ‘콜클라베’의 무효를 선언하면서 분열이 시작됐다. 이들은 이후 클레멘스 7세를 옹립해 우르바노 6세 축출을 시도했으나 이에 실패해 아비뇽으로 옮겨 교황청을 조직했다. 이때부터 1417년까지 유럽에 교황이 2명인 시대가 됐고 교회가 분열되면서 교황의 힘이 점차 약해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로마와 아비뇽 교황청은 서로 정통성을 주장했으며, 유럽 각국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지하는 교황을 달리했다. 이와 같은 갈등은 결국 서로를 파문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고 유럽사회는 대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갈등 봉합을 위해 1409년 피사공의회가 소집돼 두 교황을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했으나 로마와 아비뇽 교황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교황이 3명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콘스탄틴 공의회로 이 문제가 일단락됐지만 교황의 권위는 과거와 같지는 못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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