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월 24일 일본군 패잔병 요코이 쇼이치 발견
[역사속 오늘리뷰] 1월 24일 일본군 패잔병 요코이 쇼이치 발견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1.24 0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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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9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2년 1월 24일은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 패잔병인 요코이 쇼이치가 발견된 날이다. 그는 1952년 일본이 패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홀로 태평양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를 두고 일본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라는 평가도 있었으며, 그의 충심에 대해 존경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가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일본제국주의가 개인을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했는지 개인의 인생을 어떤 식으로 망가뜨렸는지 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27년여 동안 괌에서 은신

요코이 쇼이치는 태평양 전쟁 당시 괌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퇴를 하자 1944년 8월 이후 27년 동안 괌 밀림에서 은신해 살았다. 그리고 1972년 1월 24일 주민들에 의해 발각됐다.

당시 괌 남쪽 탈로포포(Talofofo) 폭포 인근 강가로 먹을 거리를 찾아 나섰다가 새우잡이 어망을 살피러 간 주민들에 눈에 띄어 몸싸움 끝에 붙들렸다.

일본으로 송환된 그는 1952년 일본이 패망했다는 사실을 접했지만 황군은 포로로 잡혀 수치를 당하느니 전사하는 것이 낫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항복을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살아 돌아와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는 두 명과 함께 은신했지만 1964년 홍수에 두 명이 휩쓸려 가서 사망하면서 혼자 은신을 했다.

양품점 점원에서

그는 일본 아이치현에서 태어나 양품점 점원으로 일하던 중 1935년 제1보충병으로 4년간 복무했다. 제대한 지 2년 만에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다시 징집돼 만주를 거쳐 1943년 2월 괌 주둔지에 배치됐다.

1944년 7월 21일부터 시작한 미국의 괌 탈환작전은 8월 10일 끝났다. 그 전투에서 미 해병과 육군은 3천여명이 사망했고, 일본군은 1만 8천여명이 숨졌다.

이 과정에서 쇼이치는 게릴라를 전개하겠다면서 밀림으로 들어갔고, 계속해서 미군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다만 전쟁이 끝난 후에 쇼이치가 별다른 전투를 하지 않은 점을 볼 때 미군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보다는 그냥 미군이 싫어서 밀림으로 숨어들어간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괌 토굴에서 과일과 물고기로 연명했고, 물은 끓여서 마셨다고 한다.

국가주의 희생양 vs 애국 군인정신

쇼이치의 귀환은 일각에서는 국가주의의 희생양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일본제국주의가 내세운 국가주의로 인해 쇼이치의 27년 인생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진정한 애국과 군인정신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있다. 쇼이치의 밀림 은신 생활이 어떤 성격인지는 지금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태평양전쟁은 전쟁광이 일으킨 것으로 그 희생은 오롯이 국민들이 져야 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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