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여 동안 괌에서 은신
요코이 쇼이치는 태평양 전쟁 당시 괌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퇴를 하자 1944년 8월 이후 27년 동안 괌 밀림에서 은신해 살았다. 그리고 1972년 1월 24일 주민들에 의해 발각됐다. 당시 괌 남쪽 탈로포포(Talofofo) 폭포 인근 강가로 먹을 거리를 찾아 나섰다가 새우잡이 어망을 살피러 간 주민들에 눈에 띄어 몸싸움 끝에 붙들렸다. 일본으로 송환된 그는 1952년 일본이 패망했다는 사실을 접했지만 황군은 포로로 잡혀 수치를 당하느니 전사하는 것이 낫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항복을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살아 돌아와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는 두 명과 함께 은신했지만 1964년 홍수에 두 명이 휩쓸려 가서 사망하면서 혼자 은신을 했다.양품점 점원에서
그는 일본 아이치현에서 태어나 양품점 점원으로 일하던 중 1935년 제1보충병으로 4년간 복무했다. 제대한 지 2년 만에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다시 징집돼 만주를 거쳐 1943년 2월 괌 주둔지에 배치됐다. 1944년 7월 21일부터 시작한 미국의 괌 탈환작전은 8월 10일 끝났다. 그 전투에서 미 해병과 육군은 3천여명이 사망했고, 일본군은 1만 8천여명이 숨졌다. 이 과정에서 쇼이치는 게릴라를 전개하겠다면서 밀림으로 들어갔고, 계속해서 미군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다만 전쟁이 끝난 후에 쇼이치가 별다른 전투를 하지 않은 점을 볼 때 미군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보다는 그냥 미군이 싫어서 밀림으로 숨어들어간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괌 토굴에서 과일과 물고기로 연명했고, 물은 끓여서 마셨다고 한다.국가주의 희생양 vs 애국 군인정신
쇼이치의 귀환은 일각에서는 국가주의의 희생양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일본제국주의가 내세운 국가주의로 인해 쇼이치의 27년 인생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진정한 애국과 군인정신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있다. 쇼이치의 밀림 은신 생활이 어떤 성격인지는 지금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태평양전쟁은 전쟁광이 일으킨 것으로 그 희생은 오롯이 국민들이 져야 했다는 점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