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거울 삼아
소련 없이
1958년 제2차 5개년 계획에서는 소련의 도움 없이 농업 및 공업 등 경제분야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모순을 제거하려고 했고, 인간 개조에 나섰다. 이에 삼면홍기(三面紅旗) 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老百姓公社) 운동이 추진됐다. 대약진운동으로 사회주의 건설 속도를 가속화하고, 인민공사를 조직함으로써 공산주의 사회로 진입하고자 했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당시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영국을 15년 이내에 추월하자는 구호를 내세웠고, ‘더 많이, 더 빨리, 더 훌륭히, 더 절약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구호를 내세웠다. 이에 공업과 농업 생산 지표를 높혔다. 겉으로는 공업과 농업 생산 지표를 달성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보고서 등에서는 목표 생산량을 달성했다고 기재돼 있지만 현실에서는 목표 생산량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철강 생산량을 따라잡기 위해 전국 곳곳에 재래식 방법의 100만개 소형 제철소를 만들어 철을 생산했지만 철강 품질이 낮아 아무데도 쓸 수 없었다. 농업의 경우 증산에만 몰두하면서 농작물을 틈이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심었다.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농작물이 결실을 맺을리 만무했다. 즉, 구호는 거창했지만 현실을 전혀 외면한 그런 대약진운동이었다. 여기에 중공업 우선 정책, 대규모 수력, 관개 사업 시행 등에 인력이 투입되면서 농업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생산량 역시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에는 농공업 생산 총액이 2배 증가했다는 식으로 기재됐다. 그것은 서류상에서만 가능한 수치였다. 여기에 1959년 하반기부터 3년간 계속된 자연재해로 인한 흉작 때문에 농업 생산은 대풍작이었던 전년도의 2억 2,500만 톤에서 1960년에는 1억 8천만 톤으로 크게 감소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1960년 이래 경제 원조가 중단되면서 수천만명이 굶어죽었다. 이런 악재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정치적 기반을 잃어버리게 됐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되찾기 위해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그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문화를 수천년 퇴보하게 만들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