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골드러시
[역사속 경제리뷰] 골드러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2.16 1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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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골드러시는 금을 찾아 이동하는 현상을 말하지만 주로 19세기 미국 캘리포니아 등에서 사금이 발견되면서 미국 개척민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간 현상을 말한다. 무려 25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골드러시가 ‘Forty-niner’(포티나이너)라는 고유명사까지 붙여졌다. 그 이유는 사금의 첫 발견이 1848년이지만 동부에 소식이 알려진 것은 1949년이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 금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드러시로 인해 캘리포니아가 개발됐고, 오늘날과 같은 캘리포니아의 성장이 이뤄졌다.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1840년대 미국은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캘리포니아를 형식상 매수로 빼앗았다. 문제는 인구 밀도가 높지 않았고, 개발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캘리포이나는 빈 땅이었다. 연방정부는 안보를 위해 동부에 살았던 사람들을 이주시키려고 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초반에는 농업으로 유인했지만 사금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사금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제임스 마셜이라는 목수인데 금이 발견되자 자신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이 일구고 있던 낭녹업 유토피아가 깨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겼다. 실제로 금을 캐기 위해 달려온 포티나이너들은 서터의 사유지에 함부로 침입해서 허가도 없이 금을 캐기 시작했고, 서터의 물건과 가축들을 훔치고, 서터 농장은 쑥대밭이 됐다. 결국 서터는 1852년 파산을 했다. 서터는 법정투쟁을 벌였고, 승소를 했지만 포티나이너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법원에 불을 질렀고, 판사를 폭행했다. 그리고 서터는 세 아들을 잃었고, 심장발작으로 1880년 서터는 사망했다. 다만 아들 존 오거스터스 서터 2세는 멀리 떨어진 땅을 상속받으면서 새크라멘토라는 도시를 설립하면서 부와 명예를 누렸다.

금광 통해 떼부자 소망

금광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동부로 퍼져 나갔고, 금광을 통해 떼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골드러시 붐을 타서 금을 캐러 온 사람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용품을 파는 상인들이 늘어났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청바지를 만든 리바이 스타라우스였다. 이로 인해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 샌프란시스코 등이 이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골드러시가 주춤해지자 이들 중 일부 도시는 쇠퇴를 하기 시작했고, 역사 속에서 사라진 도시들도 있었다. 또한 골드러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멕시코계 원주민들은 대재앙이었다. 수많은 백인 이민자들에게 학살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백인들이 학살을 하지 않아도 백인들이 옮겨온 전염병 때문에 죽음을 당해야 했던 원주민들도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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