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급속도로 이행
문제는 프랑코 추종자들은 불만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공산당의 합법화나 ETA의 테러, 20%가 넘는 실업률 등이 발생하면서 우파들 사이에서는 군사독재의 부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에 군부 내에서는 구국 내각을 구성하고 의회 권한을 축소하고 군부 독재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는 계획도 세워지기 했다. 1978년 11월 쿠데타 계획인 ‘갈락시아 작전’이 발각되면서 핵심 관계자는 처벌을 받았지만 여전히 군부 내 쿠데타의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갈락시아 작전에 참여했던 핵심관계자인 안토니오 테헤로는 헌병군 중령으로 복귀한 후 1981년 2월 23일 200명의 치안경비대를 이끌고 스페인 하원 의사당을 난입해 350여명의 하원의원과 정당 대표, 내각 관료들을 인질로 잡았다.카를로스 1세 대응
카를로스 1세가 반란 소식을 듣자 군사참모를 소환하고 스페인 전역에 명령을 내려 자신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카를로스 1세가 자신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판단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카를로스 1세 최측근 몬데 하르 기병대장이 반란군 기갑사단에 전화를 걸어 국왕의 의도를 전달했고, 대부분을 병영으로 복귀시켰다. 그리고 공수부대 충성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이미 사단장급 장성들은 카를로스 1세가 사관학교에 다니던 시절 알게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국왕의 명령을 따르게 됐다. 이에 당연히 국왕에게 충성을 했다. 게다가 전세계는 카를로스 1세에 대한 지지를 청명하면서 반란군은 더욱 입지가 곤란해졌다. 결국 반란군은 무기를 버리고 의사당 밖으로 도주했다.프랑코 추종 세력의 소멸
이로 인해 프랑코 추종 세력은 완전히 소멸하게 됐다. 그러면서 프랑코 파시즘에 대한 스페인 국민들의 반감이 더욱 커지게 됐다. 그리고 군부 세력의 몰락 역시 의미가 상당히 크다. 스페인 내부에서도 군부가 더 이상 정치에 개입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