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조선신궁
[역사속 경제리뷰] 조선신궁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2.2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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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
조선신궁.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조선신궁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세운 일본식 신사이다. 조선신궁 위치는 현재 남산 중턱이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신’(神)을 모신 사당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이기도 했고, 내선일체의 상징이기도 했다.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제신(祭神)으로 봉안해 모셨고, 메이지 천황이 생전에 패용했던 검을 하사받아 신궁의 보물로 간직했다.

해방되자마자 일본인에 의해 해체됐었지만 일부 시설은 남아있다가 현재는 아예 흔적조차 사라졌다.

다른 종교에 대한 위기감

일본식 신사가 한반도에 건립된 것은 17세기 후반이다. 왜관이 점차 성장하면서 왜관을 중심으로 신사가 건립됐다.

그러던 것이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일본인들이 조선땅에 대거 들어오면서 왜관이 붕괴되면서 남산 지역에 일본인 거류민들이 증가했다. 그러면서 신사 건립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광무 2년(1898년) 서울 남산 일대에 아마테라스를 주된 신으로 모시는 남산대신궁이 창건됐다. 그리고 1916년 경성신사로 개칭됐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대한제국이 일본제국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 신토계가 조선땅에서 신토 종교를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다른 종교들의 압박 때문이다. 당시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이 융성했는데 주로 항일 정신을 고취시켰다. 그러다보니 신토계에서는 신토를 조선땅에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신토 포교 위해

이에 신토계에서는 ‘조선신사’가 경성(서울)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여러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남산 중턱을 선택했다.

조선신사에 모시는 신으로 ‘아마테라스’ ‘메이지 천황’ 이외에도 ‘단군’과 ‘이성계’를 모실 계획을 했었다. 그래야만 내선일체를 이뤄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1925년 완공됐고, ‘신’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신사’가 아닌 ‘조선신궁’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조선인들에게 참배를 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이질적인 건물인데다 남산 중턱에 있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참배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0년대 의무적으로 신사에 참배하라는 훈령을 공포했고,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단체 참배를 강요했다.

해방 이후

해방 되자마자 일본인들은 조선신궁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해체하지 않으면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신궁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1955년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만 80세 생일 기념으로 이승만 동상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4.19혁명이 발발하자 시위대에 의해 파괴되기도 했다. 그리고 해당 자리에 국회의사당을 건축하려고 했지만 5.16 군사반란으로 인해 중지됐다.

그리고 1968년에는 조선신궁 본전터에 남산식물원이 열렸다. 그리고 남산어린이회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이 개관됐다. 남산어린이회관은 이용자에 비해 너무 비좁았기에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사용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서초동으로 이전하고 현재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남산 계단은 국회의사당을 짓는다면서 지반을 닦고 대공사를 했는데 그때 조선신궁 계단 석재 등을 재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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