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3월 4일 숙칭대학살 종료
[역사속 오늘리뷰] 3월 4일 숙칭대학살 종료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3.04 0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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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칭 대학살 한 장면.
숙칭 대학살 한 장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2년 3월 4일은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 화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인종 청소사건인 숙칭대학살이 종료된 날이다. 2월 18일부터 3월 4일까지 벌어진 사건이다. 숙칭대학살은 말레이시아계 중국인 화교들에게도 확대됐다. 사망자만 약 4~5천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것은 보수적으로 잡은 것이고, 학계에서는 대략 5만명 정도 추정하고 있다. 숙칭(肅清)은 말 그대로 ‘숙청’을 의미하며, 일본 제국의 중국인 인종청소를 말한다.

태평양 전쟁 일으키고

일본 제국은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영국령 홍콩을 점령했다. 대영제국이지만 손쉽게 식민지를 일본제국이 빼앗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서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전선을 확대하면서 필리핀, 괌 등을 미국으로부터 빼앗았고, 영국령 말레이 연방까지 쳐들어가면서 말레이 연방 최대 도시였던 싱가포르까지 침공했다. 영국군은 저항을 했지만 손쉽게 패배했고, 싱가포르에 주둔했던 영국 해군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호주로 패퇴했다. 상가포르를 점령했던 일본군은 약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본군은 엄청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중국계라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고, 많은 탄압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영국군 장병 등도 살해 당했다.

게릴라 제거 목적으로

숙칭대학살은 일본군이 게릴라를 제거하기 위해 자행한 학살로 일본이 추산한 숫자는 5천여명이고, 학계는 5만명, 싱가포르 사람들은 1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이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결국 인간 도축행위를 한 것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싱가포르를 빠져 나와 호주로 숨어들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싱가포르로 다시 들어가기도 했다. 일본군은 난징대학살 때처럼 사람의 목에를 버어 수급을 챙기는 것을 일종의 ‘놀이’로 생각하기도 했다. 싱가포르에서 현재도 반일 감정이 강한 이유는 숙칭 대학살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여성들은 위안부로 끌고 가기도 했다. 또한 싱가포르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을 약탈했다. 또한 속칭 바나나달러라고 불리는 일본 발행 달러가 병행됐다. 그것은 화폐의 남발로 이어졌으며, 호주로부터 식량이나 자원을 수입하지 못하면서 생필품 가격은 오르는 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했다.

싱가포르에서 한 달 동안 버티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했지만 싱가포르에서는 한 달 동안 버티기 전략을 사용했다. 영국 해군이 계속해서 항복하라고 설득했지만 설득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한달이 지난 후에 설득된 일본군은 영국에 항복하면서 싱가포르는 해방됐다. 그러다보니 싱가포르에서는 반일 감정이 크다. 이에 싱가포르에서는 욱일기가 없고, 일본군 미화 등은 금기시됐다. 싱가포르에서는 일본 요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젊은 층에서도 일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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