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왕위다툼
통일신라는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태종 무열왕계 왕위 세습이 단절됐다. 785년 선덕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신라 화백회의는 차기 왕을 선택하는 귀족회의가 열렸다.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을 차기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불어날 알천을 건너지 못해 궁궐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에 귀족들은 때마침 내린 비를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판단하고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했다.(원성왕) 김주원은 명주(강릉)으로 물러났지만 김헌창은 중앙정계에 남아 활약을 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국무총리급인 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헌덕왕 때는 무진주 도독, 청주 도독, 웅천주 도독 등 지방직을 전전했지만 상당한 우대를 받았다.김주원 왕 되지 못해서?
그런 김헌창이 822년 갑작스럽게 난을 일으켰다. 이유는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30여년이 넘은 과거의 일이었다는 점에서 난을 일으킨 이유가 불분명했다. 게다가 명주에 있는 김주원 세력은 김헌창의 난에 동조를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이유는 김헌창 본인의 욕심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옛 백제 지역 수령들이 반란에 가담했다. 그것은 김헌창이 지방관으로 부임하면서 옛 백제 백성들의 민심을 알았고, 이를 역이용해서 분리주의 성격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만약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견훤의 후백제 건국이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만큼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면서 철저히 통일신라와 분리주의 정책을 구사했다. 실제로 궁예나 견훤 역시 신라 지역 출신이었지만 옛 고구려 백성과 옛 백제 백성들의 분리주의를 내세워 후백제를 건국한 것과 연결된다.의외로 쉽게 무너져
김헌창은 난을 일으켰지만 신라군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다. 주요 길목에 군대를 보내서 철저하게 방어를 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하면서 쉽게 격파가 됐다. 반면 신라군은 나라가 위기에 봉착했다고 생각하면서 똘똘 뭉쳐 싸웠다. 그러면서 장안국의 병사들을 격파해 나갔고, 결국 김헌창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신라는 김헌창의 난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관료개혁을 위해 노력했고, 5소경에 군사적 기능을 부였다. 만약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후삼국시대 신라가 견훤의 후백제를 상대로 26년간 버티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