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87년 6월 항쟁은 6.29 선언을 이끌어 내면서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다. 정치적으로는 전두환 정권의 연장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 등으로 인해 분노한 시민들이 광장으로 뛰쳐나오면서 민주화를 달성했다.
하지만 정치적 요인 이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특히 대학 증원과 3저 호황 등의 요인도 작동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
박정희 정권인 1978년 10월 대학교 관련 대책이 나왔다. 문교부는 당시 33.1%였던 대학진학률을 53.3%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1979학년도 대학입학 정원은 4만 9천490명 증원하고, 1980년에는 5만~7만명을 대폭 증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2년만에 대학생 수를 10만명 늘린다는 계획이다.
이에 서울 소재 대학교를 지방에 이전하는 등의 방안을 세웠지만 서울 소재 대학들이 공동화를 내세우면서 반발했고, 이에 분교를 만들기로 했다.
어쨌든 그러면서 1980년대 대학들이 많이 설립됐고, 그만큼 대학생들도 많이 배출됐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면서 사회에 들어섰고, 그들은 넥타이 부대가 된 것이다.
3저 호황으로
특히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연평균 12.1% 성장을 하고 실업률이 4.0%에서 2.5%로 떨어졌다. 그것은 그만큼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게 되면 취직할 직장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학생들은 주로 사회문제 특히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학생운동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당시 노동시간은 평균 3천 시간이었다. 아울러 노동자의 노조 가입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이에 대학졸업자들이 취업을 했지만 열악한 노동 현실에 부딪혀야 했다. 그것은 결국 정치적 분노로 표출되면서 그에 따라 6월 항쟁이 일어나게 됐다.
중동건설 붐으로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초반부터 중동건설의 붐이 일어나면서 중동 지역에 수많은 건설노동자들이 일을 하러 갔다가 돌아왔다. 그러면서 중산층이 늘어났고, 컬러TV와 비디오 플레이어 보급으로 인해 미국이 아닌 서구 유럽 등의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에 사람들의 인식이 점차 민주화로 이어지게 됐다. 특히 기성세대와는 다르게 신세대는 전후세대로 불린다. 그들은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이어오면서 수직적 사회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게 됐고, 그것이 6월 항쟁으로 분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