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80년 4월 17일은 주조선 일본공사관이 설치된 날이다. 1876년(고종 13년) 조선과 강화도 조약ㅇ르 체결한 일제는 1879년(고종 16년)에 조선에 공사관을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대리공사로 임명한 뒤 조선에 파견했다.
하나부사는 돈의문 밖 천연동에 있는 경기중군영을 공사관으로 삼고 그곳에 입주했다. 경기중군영은 조선 후기 경기도 순영의 지휘관인 중군이 있었던 곳으로, 이 일대에서 맑고(淸) 차가운 물(水)이 솟아난다 하여 ‘청수관(淸水館)’이란 별칭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1880년 하나부사가 정식 공사로 임명받으면서 청수관은 정식으로 공사관이 됐다. 이로써 조선이 외국과 근대식 외교관계를 맺은 이래 처음으로 생긴 외교공관이 됐다.
근현대사와 함께
주조선 일본공사관은 근현대사와 함께 해왔다. 1882년(고종 19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구식 군인들이 일본공사관을 습격했다. 이에 공사관 직원 3명이 살해당했고, 하나부사 공사는 기밀문서를 소각하고, 인천으로 피신했다. 이때 공사관 건물도 불탔다.
청수관이 불타자 일본공사관 측은 교동에 새 공사관을 짓기로 하고 1882년(고종 19년) 8월 이종승 집을 임시로 빌려 입주했다.
1884년(고종 21년) 교동에 있는 박영효의 집으로 옮겨 새로 짓는 공사관의 완성된 건물과 함께 사용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갑신정변으로 불타 사라졌다. 그러자 1885년(고종 22년) 1월 3일부터 전 경기감사 김보현의 집과 경기감영 선화당에 잠시 머물렀다.
한성조약 체결 후
갑신정변 이후 ‘한성조약’을 체결하면서 공사관 부지 및 건축비를 조선측에 요구했고, 1885년(고종 22년) 1월 예장동으로 옮겼고, 서양식 공관 공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일본공사관이 일제의 조선칙략 핵심 기지가 됐다.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시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일본공사관은 한동안 유지됐다가 이듬해인 1906년(광무 10년) 2월에 한국통감부의 신설로 폐쇄됐다.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에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이곳에서 체결했다. 일주일 뒤인 8월 29일에 공식 발표를 하면서 조선왕조는 518년 역사를 끝으로 멸망했고, 조선은 1945년 8월 15일까지 34년 11개월 16일 동안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한국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개편됐으며 조선총독부는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을 수탈하고 조선인을 탄압하는 식민통치기관으로 기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