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4월 22일 카브랄, 브라질 도착
[역사속 오늘리뷰] 4월 22일 카브랄, 브라질 도착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4.22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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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500년 4월 22일은 포르투칼 귀족 출신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브라질에 도착한 날이다. 이로써 남미 대륙이 서구유럽 역사의 중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브라질은 고대 역사 이래 석기시대를 유지해왔다. 특히 브라질은 밀림 지역이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석기시대 문명을 유지해야 했다. 남미에는 존재했던 잉카문명, 타이로나 문명, 무이스카 문명 등과도 거리가 멀기 때문에 석기시대 문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도항로를 막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 탐험대가 포르투칼에 귀환을 하면서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13척의 함대를 끌고 1500년 3월 9일 리스본을 출발했다. 그리고 4월 22일 브라질 영토에 도달했다.
1494년 스페인과 체결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경계선(서경 43도 37분)의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브라질은 포르투갈령으로 확정됐다.

포르투칼 개척자들이

이후 포르투칼 개척자들이 내륙 강 상류로 배를 타고 올라가면서 남미 대륙 내륙 대부분을 추가하면서 현재 브라질 영토의 틀을 잡았다. 그러면서 스페인은 남미대륙 서해안을 점령해야 했다. 문제는 스페인 점령한 남미대륙 서해안 지역 즉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지역에서는 금, 은, 구리, 주석, 납, 백금 등 지하자원이 쏟아져 나온 반면 브라질에서는 자원개발이 쉽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대항해시대 초창기에는 브라질에 대해 실망을 했고, 결국 인도 교역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게다가 브라질은 열대우림 지역이기 때문에 개척이 쉽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도로와 도시 등을 갖췄고, 옥수수 재배가 가능했지만 브라질은 열대우림이었기 때문에 원주민들도 많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나마 존재했던 원주민들도 포루투칼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전염병에 감염되면서 많은 인구가 감소했다.

플렌테이션 농업도

서인도제도 등에서는 사탕수수 등 플렌테이션 농업이 가능했지만 브라질에서는 그나마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포르투갈인 대농장주들이 겨우 찾아낸 것이 ‘파우 브라질’ 이라는 빨간색 염료의 원료가 되는 나무였다. 1808년 나폴레옹이 포르투칼을 침공하면서 왕실이 브라질로 망명을 떠나면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가 포르투칼 왕국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위상이 커졌다.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포르투칼 왕국이 다시 본토로 돌아갔지만 브라질은 포르투칼 본국과 맞먹으려고 했다. 그러자 왕실은 브라질 위치를 격하하면서 탄압했다. 이에 1822년 포르투칼 의회에서 브라질 제국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왕세자 동 페드루가 황제로 등극했다. 이에 1822년부터 1825년까지 브라질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1825년에 브라질 최남단에 있던 시스플라티나 주(현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등에 업고 독립에 나서자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500일 전쟁을 일으켰다.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이런 내전 과정에서 프데루 1세는 1830년 5살 짜라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포르투칼로 도망쳤다. 페드루 1세 축출로 브라질은 내전 상태에 빠졌지만 페드루 2세가 성인이 돼서 친정을 시작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페드루 2세는 커피 재배 등을 통해 강력한 경제발전 정책을 취했다. 1888년 노예제 완전 폐지를 선언하면서 농장주 등 기존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커졌고, 1889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군주제에서 공화국으로 바뀌게 됐다. 또한 커피 재배는 브라질의 부를 축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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