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정세권 그리고 북촌한옥마을
[역사속 경제리뷰] 정세권 그리고 북촌한옥마을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4.22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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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북촌한옥마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삼청동 내 한옥 밀집지역을 말한다. 북촌한옥마을이라고 하면 전통한옥을 떠오르기 쉽지만 20세기 들어와서 개량한옥의 밀집지역이 바로 북촌한옥마을이다. 북촌이 원래 양반 특히 고위 관직을 가졌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지만 일제강점기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이 점차 북촌으로 영역을 넓히는 것을 걱정했던 독립운동가 정세권 선생이 계획한 부동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탄생됐다.
오늘날 북촌한옥마을 만든 정세권./사진=연합뉴스
오늘날 북촌한옥마을 만든 정세권./사진=연합뉴스

정세권의 일생

정세권 선생은 1888년 4월 10일 태어났다. 집안은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 1920년 일제가 회사령을 철폐하면서 일본 자본이 조선으로 유입되자 민족 자본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일본인은 명동이나 용산 일대 남촌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점차 종로 일대로 옮기면서 상업활동을 확장했고, 주거지 역시 북촌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가운데 조선인들은 대형관급공사 참여가 불가능했다. 그러던 가운데 1920년대 들어서면서 경성(현 서울)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면서 조선인들에게는 도시형 소규모 주택이 필요했다. 정세권 선생은 그것을 파고들면서 1910년대 후반부터 주택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정세권 선생이 생각한 것은 전통한옥을 변형해서 현대적으로 개량한 것이다. 수도와 전기를 도입하고, 환기 및 일조권까지 신경을 썼으며, 장독대와 창고 위치를 실용적으로 바꾸고, 대청에 유리문을 다는 등 기존 전통한옥이 아닌 개량형 한옥을 개발했다. 처음에 익선동을 중심으로 개량형 한옥을 보급했다. 소규모 개량형 한옥을 대량으로 만들면서 분양 대금을 낮췄다. 여기에 일시불은 물론 분납제를 도입하면서 주택 구입의 부담마저 낮췄다. 정세권 선생은 그렇게 큰 부를 축적하면서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가 발기하자 서울지회를 설립했고, 재정적 지원을 했다.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되자 서울지회에서 활동을 했다. 아울러 조선어학회 활동도 지원하면서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지원을 했다. 그러자 일제는 정세권 선생에 대한 탄압을 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뚝섬에 있던 3만 5천여평의 토지와 재산을 빼앗았고, 그러면서 가세가 기울어졌다. 문제는 조선 백성들의 시선도 별로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집 장사’하는 사람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건축가들에게도 별로 좋은 시선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전통한옥의 양식을 파괴하고 개량형 한옥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북촌한옥마을

정세권 선생이 개발한 부동산 프로젝트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북촌한옥마을이다. 원래 조선왕조 때 관료 출신 특히 고위급 관료들이 살던 지역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일본인들이 점차 북촌으로 진출하려고 하자 정세권 선생이 이 지역의 땅을 구입해서 개량형 한옥을 만들어 분양했다. 즉 북촌한옥마을은 우리나라 한옥대단지인 셈이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북촌에 거주했던 권세가들이 점차 자신의 한옥을 내놓았다. 그것을 정세권 선생이 구입해서 토지를 쪼개서 소규모 개량형 한옥을 만들어 다시 조선인에게 분양을 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전통한옥 구조인 ㅁ자 안에 개량형 한옥을 만들었다. 이에 부엌과 화장실 등을 신식으로 개선했고, 근대적 시설 역시 들어섰다. 소규모 개량형 한옥이기 때문에 날개 돋힌 듯이 팔렸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집값 때문이다. 오늘날 북촌한옥마을은 ‘전통한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1920년대 정세권 선생이 분양한 소규모 개량형 한옥대단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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