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공원으로
장충단 제사는 1908년까지 지냈지만 나라의 제사 제도가 통폐합되면서 중단됐다. 다만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죽으면서 일제는 국장을 선포하고 국민추도회 행사를 장충단에서 열었다. 그것은 장충단의 의미를 능멸했다. 1910년 경숡국치 이후 일제는 장충단을 폐사시키고 1919년 공원으로 만들었다. 이에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자 전사한 일본군인들, 특히 폭탄 3용사 동상을 세우면서 일본식 공원을 만들었다. 1929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인 박문사를 지었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시에서 일본풍이 짙은 시설들을 모두 철거했지만 공원으로서의 기능을 계속 유지했다. 1950년에는 6.25 전쟁으로 일부 시설들이 파괴당했으며,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정치 유세 현장으로도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1957년에 있었던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과 1971년에 있었던 제7대 대통령 선거 유세 등이 있다. 공원 경내에도 여러 가지 시설이 들어왔다. 수표교는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철거가 되면서 해당 공원으로 이전했다. 또한 세종대왕기념관 역시 함께 옮겨졌다. 1964년에는 이준(李儁)의 동상이, 1968년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의 동상이 건립됐고, 1968년에는 아름다운 분수대도 설치됐다. 1962년 이후로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중앙공무원교육원(그 뒤 동국대학교로 양도)·재향군인회 등이 들어서면서 공원 면적이 점차 축소됐다. 또 도시계획법상 근린공원 내에 들어갈 수 있는 시설로 되어 있는 국립극장·국립국악원 등도 들어섰으나, 그 뒤 일부 기관은 다른 곳으로 이전됐다. 아울러 어린이야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등 체육시설이 들어섰다. 그리고 1984년 독립된 근린공원으로 존속할 경우 더 많은 시설들이 들어갈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서 남산공원 일부로 합병했다. 장충단공원 일대는 승정전, 관성묘, 와룡묘 등 문화재를 비롯하여 3·1운동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만해 한용운 시비와 유관순, 이준열사, 김용환 선생 동상 등 항일운동과 관련된 애국충정이 깃든 민족공원이라 할 수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