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4월 25일 흥선대원군 척화비 건립 명하다
[역사속 오늘리뷰] 4월 25일 흥선대원군 척화비 건립 명하다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4.25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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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71년 4월 25일은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이 전국 각지에 척화비 건립을 명한 날이다. 흥선대원군이 서양 혹은 양인이 침범을 하는데 싸우지 아니한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는 뜻으로 척화비를 세웠다. 비문을 살펴보면 ‘洋夷窃取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이다. 즉, 서양 오랑캐가 침범을 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발생하면서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 및 유림 등의 입장이 확고해지면서 그에 따라 척화비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1882년 청나라에 납치되고, 명성황후가 환궁하면서 일본 공사의 요구에 따라 철거되거나 매장됐다.

통상수교 거부 정책

흔히 쇄국정책이라고 부르는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사실 새삼스런 정책은 아니었다. 정조대왕 때인 1797년 영국 해군 군함인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정부는 통상 수교를 거부했고, 이에 돌아갔다. 흔히 이양선이라고 부르는 서양 선박이 나타난 것은 흥선대원군 때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마다 조선 정부는 통상 수교를 거부했다. 통상수교를 거부한 이유는 단지 조선 왕조가 대외 무역을 억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대외 무역이 활발했던 한반도 였지만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명나라가 폐쇄적인 농업국가를 지향하게 되면서 조선도 그 정책을 따르게 됐다. 또한 국내 시장과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으면서 대외 무역이 가능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시대는 ‘청백리’를 강조하면서 소비를 멀리하는 국가였다. 그러면서 대외 무역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즉, 서양 선박이 한반도에 나타난다고 해도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이양선’이 나타나면 핑계를 대서 내쫓은 것이다.

서양은 침략 오랑캐라는 인식이

순조, 헌종, 철종 시대에도 이양선이 출입을 했지만 서양인들을 ‘오랑캐’라고 인식하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1868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인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이 발생하면서이다. 이로 인해 병인박해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졌다. 이로 인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입장에서 서양은 남의 아버지 묘를 파헤치는 ‘오랑캐’와 같은 족속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고, 그들과 통상을 한다는 것은 결국 오랑캐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통해 서양 오랑캐를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면서 척화비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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