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사무라이
[역사속 경제리뷰] 사무라이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6.07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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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사무라이는 일본 봉건시대 무사 계급을 말한다. 유럽으로 따지면 ‘기사’와 비슷하다. 사무라이하면 일본의 상징이면서 무사의 상징으로 취급돼 왔었다. 하지만 그 속내는 다르다.

오늘날 갖고 있는 사무라이 이미지는 ‘일본 문화’가 미화돼서 서방세계에 알려졌기 때문이지 사무라이의 실체는 그야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 사무라이는 양민보다 높은 신분으로 칼을 차고 다닐 권리가 있는 특권계급이었다.

귀족 경호에서 출발

사무라이는 헤이안 시대부터 나타났다. 이들은 귀족을 경호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그런데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귀족계급이 몰락하고 하급 계층들이 하극상을 일으키면서 지역 토호들이나 하급 군인 즉 사무라이가 새로운 무사 계급인 ‘센고쿠 다이묘’가 됐다.

아스카 시대가 끝나고 귀족들의 지방 분권 체제가 확립되면서 헤이안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면서 10세기 초반부터 율령제가 무너졌다. 즉, 중앙집권이 아닌 지방분권의 시대로 접어들게 됐다.

중앙정부는 지방 세력가인 ‘고쿠시’들에게 해당 지역을 다스리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줬다. 그리고 고쿠시들은 농민들에게 경작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면서 ‘다토’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영주라고 자처하면서 다토와 고쿠시 간의 권력 충돌이 생겨났다. 이에 도토들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무력집단을 만들게 됐는데 이들이 사무라이다.

센고쿠 시대에서

센고쿠 시대에 접어들면서 각 지방을 다스리는 사무라이인 다이묘와 으뜸격인 쇼군을 중심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면서 사무라이 시대에 접어들었다.

사무라이들은 다이묘 휘하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 다이묘로부터 보호를 받고 영지를 하사받는 대신 사무라이는 다이묘를 주군으로 섬기면서 그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병력을 고용해 전쟁을 했다.

하지만 센고쿠 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 시기에 접어들면서 사무라이의 권한이 많이 줄어들었다. 전쟁이 사라지면서 일본 경제가 성장하게 되고, 그에 따라 서민 계층인 쵸닌이 급부상하면서 사무라이의 위세가 과거와 같지 않았다. 더욱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무라이의 농업 종사를 금지시켰다. 이에 결국 사무라이는 죠닌들 밑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상인을 호위하는 일을 맡았다.

그나마 에도 시대에는 사무라이가 명맥을 유지했지만 메이지 유신 시기에는 사무라이 계급이 사라지게 됐다.

사무라이는 직장인

센고쿠 시대나 에도 시대 사무라이를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직장인’이었다. 사무라이가 보통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사무라이는 주군인 다이묘 등이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거나 사무라이에 대한 대접이 충분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다른 주군을 섬겼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회사가 비전이 없거나 연봉이 불만족 하면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로 전쟁을 하다가 주군을 버리고 상대방으로 옮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대표적인 전투가 세기가하라 전투였다.

사무라이가 모시던 주군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주군으로 삼는 이유는 봉급 체계 때문이다. 사무라이 중 10% 가량만 영주가 가진 영지의 일부를 위임받아 직접 농민으로부터 쌀과 농산물 등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나머지는 1년에 3회 영주의 쌀 창고에서 쌀을 배급 받았다. 즉, 섬기는 영주가 자신에게 쌀 배급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미련 없이 주군을 버리고 다른 주군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섬기는 주군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섬기는 주군이 없는 경우는 ‘로닌’으로 이들은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이처럼 사무라이가 봉급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무라이는 농지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원칙 때문이다.

부업으로

본래 사무라이는 부업을 가지면 안되지만 에도 시대 들어오면서 하급 사무라이는 부업으로 생계를 챙겼다. 다만 외부에는 알릴 수 없었다. 사무라이가 부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간의 접촉이 사실상 없는 부업을 선택하게 되면서 주로 물건을 제작하게 됐고, 훗날 ‘장인 정신’인 ‘모노쓰쿠리’로 발전하게 됐다.

부업으로 먹고 살기 위해 대장간이나 공방에서 일을 하다보니 남에게 말을 못하는 부끄러운 일이 됐으며, 물건 만들기에만 몰두하게 됐고, 그것이 ‘모노쓰쿠리’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사농공상의 계급이 무너지게 되면서 물건을 만드는 사무라이들이 상업까지 섭렵을 하면서 그에 따라 점차 큰 회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됐고, 한때 무역상사를 포함한 일본의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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