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기반 위에
고려말 과전법 개혁을 통해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면서 태조를 지나 세종을 거치면서 집현전에서 활약을 하면서 관학파가 성장해나갔다. 집현전은 왕의 자문기관 역할을 하면서 연구기관이었다. 따라서 국정운영에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않으면서 연구를 통해 왕의 국정운영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문종대까지 집현전을 통해 과학기술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도 상당히 꽃을 피우게 됐다. 이런 이유로 집현전 학사 출신을 ‘관학파’라고 부른다. 특히 세종대왕 시절 ‘양전 사업’은 그야말로 관학파가 이뤄낸 최대 성과 중 하나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토지조사사업인데 만약 집현전 학사인 관학파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관학파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림파와 같은 유교원리주의 학자들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각종 학문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연구를 했다.계유정난으로
관학파가 무너지게 된 것은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실권을 잡으면서 훈구파가 득세를 했기 때문이다. 흔히 관학파와 훈구파를 같은 세력이라고 생각하지만 관학파와 훈구파는 완전히 다른 세력이다. 훈구파는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신집단을 의미하고, 관학파는 조선초기 집현전 학사 출신을 의미한다. 관학파는 연구활동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라면 훈구파는 왕권강화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다. 그러다보니 세조가 집권하자마자 집현전을 없애고, 홍문관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했다. 그것은 학문을 중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왕권강화와 자신의 기득권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미 관학파가 세조 때 무너지면서 성종 때는 사림파가 진출을 하면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이 일어났고, 연산군 때를 비롯해서 각종 사화에 휘말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관학파가 융성해지기 위해서는 왕이 학문 탐구에 상당한 관심을 둬야 했다. 하지만 연산군 때부터 왕이 학문에 열중하기보다는 자신의 기득권 유지에 관심을 두면서 관학파가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