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597년 7월 15일(음력) 칠천량해전이 발발한 날이다. 경상도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 해협으로 당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학살 당한 패전이다.
후폭풍은 엄청났다. 비록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승리를 했지만 조선의 바다 방어선이 뚫리면서 전라도가 왜군에게 장악 당했다.
다만 명량해전을 통해 충청도 바다를 지키고, 금강 하구를 지키면서 조선과 명나라는 왜군을 전라도와 경상도에만 국한시키게 만들었다.
조선 수군의 확장 그에 따른 한계 봉착
조선 수군이 이순신 장군 휘하에 대승을 계속 거두면서 확장해 나갔다. 칠천량해전 당시 판옥선도 160척 그리고 거북선이 3척까지 늘어났다.
문제는 이를 뒷받침할 수군 특히 격군이 턱없이 부족해졌다는 점이다. 그것은 갑오년(1594년)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았는데 이때 이순신 장군 휘하의 2만 명이었던 병력이 을미년(1595년) 봄 41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활을 쏘는 사수는 물론 노를 젓는 격군을 양성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즉, 병력이 급감했다는 것은 이순신 장군에게 있어 고민이었다. 이런 이유로 선조가 부산을 진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해협을 틀어막고 일본 수군의 진격을 막을 수는 있지만 적극적인 공격을 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본 수군의 전력 강화
게다가 일본 수군의 전력 강화도 이뤄졌다. 전쟁 초기에는 세키부네를 주력 부대로 삼았다. 세키부네는 판옥선보다 훨씬 작았고, 화포 등에게 약했으며, 세키부네에 화포를 장착해서 발사를 할 수 없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 수군에 맞서기 위해 대형 선박인 아타케부네를 다수 건조했다. 아타케부네가 아직 판옥선에 비해 전력이 약하지만 그래도 조선 수군에 맞설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게 됐고, 무엇보다 화포를 장착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조선 수군이 적극적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이순신 장군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선조의 공격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원균은 자신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렇게 해서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을 하게 됐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됐다. 그러나 통제사에 임명된 원균도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전력 차이를 점차 깨닫게 되면서 부산 진격을 꺼려했지만 결국 부산으로 나아가야 했고, 그리고 칠천량에서 대패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로 복귀한 후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치게 되면서 전라도 바다를 일본군에 넘겼지만 충청도 바다를 지킬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