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3.1운동이 실패하자 조선 지식인 청년들은 비관과 절망 그리고 퇴폐에 빠지게 됐다. 그러면서 폐허를 통해 그것을 발현했다. 다만 자신들은 퇴폐적이라고 자처하지 않앗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훗날 대문호가 됐다는 점에서 폐허를 단순히 퇴폐주의 문학 잡지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여성잡지인 ‘신여자지’의 필진이 대거 유입돼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폐허가 자유연애 등을 추구했다. 이들은 폐허 잡지를 통해 자신의 문학을 내세웠고, 그리고 훗날 대문호가 되기도 했다. 김억은 폐허 창간호에서 19세기 말 프랑스 상징파 시인 보들레르를 ‘스핑크스의 고뇌’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1921년 간행했다. 김일엽은 여성해방과 자유연에에 대한 논설을 발표했는데 2호에서 여성의 지위인식과 해방을 논하는 ‘먼저 현상을 타파하라’라는 논설이 대표적이다. 황석우는 ‘애인의 인도(引渡)’, ‘석양은 꺼지다’, ‘태양의 침몰’ 등을 발표했고, 오상순은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 ‘허무혼(虛無魂)의 선언’ 등의 시를 발표했다. 염상섭은 ‘표본실(標本室)의 청개구리’를 통해 유명세를 떨쳤다.일제에 의해 폐간
다만 조선총독부가 폐허 2호를 끝으로 1921년 1월 20일 강제로 폐간 당했다. 그것은 자유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 작품과 서구 작품 소개 등으로 반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특히 폐허 작가들이 러시아 문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소련의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문학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우려가 폐간을 하게 만들었다. 비록 2호를 끝으로 폐허가 폐간을 했고,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은 우리 문학계를 이끄는 거목이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