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8월 8일 문화대혁명 단초인 마오쩌뚱 논평 발표
[역사속 오늘리뷰] 8월 8일 문화대혁명 단초인 마오쩌뚱 논평 발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8.08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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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샴체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한 장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66년 8월 8일은 중국 문화대혁명의 단초가 된 마오쩌뚱의 ‘사령부를 폭격하라-나의ㅡ 대자보’라는 짧은 논평이 인민일보에 실린 날이다. 내용은 공산당 안에 우파를 척결하자는 내용이지만 사실상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그러면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다. 그것은 홍위병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었고, 홍위병이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반마오주의 세력에 대한 학살을 단행했다.

반마오주의 세력에 대한 학살은 물론 역사와 문화 등도 파괴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쳤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1949년 국공내전 승리로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게 됐다. 그러면서 공산당에 대한 중국인들의 기대가 컸다. 이에 마오쩌뚱은 대약진 운동을 통해 중국을 성장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대약진 운동은 자체만으로 이미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동이었다.

그러면서 마오쩌뚱은 뒤로 물러나고 류사오치가 전면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야말로 마오쩌뚱에게는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게 됐다.

그러다보니마오주의 이상을 믿고 있던 공산당 내부 급진파와 혁명적 청년 공산주의자 입장에서는 류사오치 정책에 대한 불만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류사오치는 ‘우파 기회주의자’였던 것이다.

여기에 1959년 ‘해서파관’이라는 연극이 발표됐는데 마오쩌뚱의 부인인 장칭과 야오원위안이 1965년 ‘문회보’라는 신문에 “이거 마오쩌둥 동지 돌려까는 내용 아닌가??”이라는 칼럼을 실었고, 이것이 퍼지면서 홍위병들이 “사회와 정치를 뒤집어 엎자!”라는 편지를 마오쩌뚱에게 보냈다.

사령부를 폭격하라

이런 상황에서 1966년 8월 8일 마오쩌뚱은 인민일보에 ‘사령부를 폭격하라-나의 대자보’라는 제목의 짧은 논평을 발표했다. 공산당 안의 우파를 척결하자는 내용이지만 사실상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척결하자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시발점이 돼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그러자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소위 16개항을 발표했다. 16개조 내용은 마오쩌뚱이 하라는 내용을 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즉, 홍위병의 활동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홍위병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마오주의에 반하는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공안이나 군인 모두 이미 홍위병에 면죄부를 준 상태이기 때문에 홍위병의 학살에 가만히 팔짱만 끼고 있었다.

결국 류사오치는 주석직에서 물러나고 가택연금 상태가 됐고, 덩샤오핑은 재교육을 세 번이나 받고, 지방의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일을 했다.

중국 5천년 퇴보시킨 사건

문화대혁명은 중국 5천년 역사를 퇴보시킨 사건이라는 평가다. 중국은 우리나라와 더불어 상당히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그만큼 문화재와 역사기록물도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고, 소실됐다. 사실상 중국 역사는 문화대혁명으로 단절됐다. 그나마 장제스가 대만으로 넘어가면서 중국 문화재를 많이 갖고 넘어갔기 때문에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의 문화가 소실되면서 중국 콘텐츠 문화가 성장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즉, 과거 역사를 비추는 그런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도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이 전세계에서 경제대국 2위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문화 콘텐츠가 취약한 것도 문화대혁명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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