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그들은 ‘땅콩’에서 멈췄어야 했다

2020-03-28     채혜린 기자
[파이낸셜리뷰=채혜린 기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지난 27일 열린 대한항공 정기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직 박탈이라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이번 일은 지난해 차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이른바 '물컵 갑질'이 도화선에서 기인한다. 앞서 지난 2014년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한진가(家)는 잠시 자숙의 시간을 보내는 듯했지만, 지난해 다시 차녀의 '물컵 갑질'로 사회적 공분 대상이 됐다. '물컵 갑질'은 오랜 시간 사내와 주변에 응축됐던 한진 오너 일가의 '갑질'에 대한 분노를 촉발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직원들은 SNS 익명 대화방을 개설해 수 천 명이 모여 그동안 쌓였던 오너 일가의 각종 '갑질'을 성토하기 시작했고, 이는 단순한 '뒷말' 수준을 넘어 오너 일가의 밀수·탈세·배임·횡령 의혹으로 번졌다. 한진 오너 일가들이 각종 위법 혐의로 경찰과 검찰, 세관, 공정거래위원회, 국토교통부 등 국가기관의 조사·수사 대상이 됐고, 조 회장의 아내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과 두 딸이 포토라인 앞에서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조 회장도 논란을 비껴가지 못했다. 조 회장은 현재 총 270억원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지난해 10월 검찰은 조 회장을 불구속 기소하면서 조 회장이 2013년부터 지난해 5월까지 대한항공 납품업체들로부터 항공기 장비·기내면세품을 사들이며 트리온 무역 등 업체를 끼워 넣어 196억원 상당의 중개수수료를 챙겨 대한항공에 손해를 끼친 혐의(특경법상 배임)를 적용했다. 뿐만 아니라 검찰은 이른바 세 자녀의 '꼼수' 주식 매매 의혹에 대해서도 같은 혐의를 적용했다. 조 회장이 지난 2014년 8월 조현아·원태·현민씨가 보유한 정석기업 주식 7만1천880주를 정석기업이 176억원에 사들이도록 해 정석기업에 약 41억원의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검찰은 당시 세 자녀가 보유한 주식이 경영권 프리미엄 할증 대상이 아님에도 이를 반영해 정석기업에 손해를 끼쳤다고 판단했다. 또한 검찰은 조 회장이 2015년 유력정치인 인척의 취업청탁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을 당시 자신의 변호사 비용과 2014년 '땅콩 회항' 사건 때 장녀 조 전 부사장의 변호사 비용 등 총 17억원을 회삿돈으로 내게 한 혐의(특경법상 횡령)도 적용했다. 검찰은 지난 1월 조 회장에 대한 추가 혐의 적용 방침도 밝혔다. 대한항공에 196억원의 손해를 끼치면서 얻은 추가 이익분에 대한 세금을 신고 납부하지 않았고, 자택 경비 비용을 계열사 회삿돈으로 지급한 혐의(횡령)도 있다고 판단해 혐의를 추가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혐의는 결국 조 회장이 경영인으로 부적절하다는 평가를 불러왔다. 대한항공 지분 11.56%를 보유한 2대 주주 국민연금은 이틀간의 장고 끝에 전날 조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국민연금은 그 이유로 조 회장에 대해 "기업가치 훼손 및 주주권 침해의 이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외국인·기관·소액주주에게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 ISS와 국내 의결권 자문사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 서스틴베스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등도 조 회장 사내이사 재선임안에 반대 투표를 권고했다. 조 회장 측은 한진칼(29.96%) 지분을 포함해 대한항공 지분 33.35%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지만, 이날 국민연금의 반대표에 외국인·기관·소액주주가 가세하면서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들은 ‘땅콩 회항’에서 멈췄어야 마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