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의 시사 인문학 365일] 5월 10일 삶의 기술

2020-05-10     파이낸셜리뷰

21세기는 기술 융합의 시대가 전개된다. 이는 마치 사람이 레고 조각들을 원하는 디자인에 따라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인간 특유의 놀라운 창의력을 동원해서 19, 20세기의 기반기술과 그로 인해 파생된 수많은 기술을 융합해서 다양한 이노베이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김성국 ‘실리콘벨리에서 만난 괴테와 스티브잡스의 대화’중에서 -

[파이낸셜리뷰] 오늘은 남은 내 인생의 첫날이자 마지막 날이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지만 다시 흐른다. 길이 끝나는 곳에 다시 길이 이어지는 것과 같다. 바로 오늘은 황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이다. 봄을 그렇게도 기다리는 것은 지난 겨울이 너무 추웠기 때문이 아닌가? 자칫 우리는 질그릇과 같아 복잡하고 빠른 세상 속에서 조그마한 충격에도 부서지기 쉽다. 종종 우리는 절망과 답답함으로 세상사는 의미도 찾지 못하고 포기하기도 하지만 끝나는 것은 없다. 세상 끝일지라도 그 이후의 것을 기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임을 알고 참고 오늘을 소중히 여기자. 위대한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작은 일들조차 소홀히 하지 않고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킨다. 신이 할 일과 인간이 할 일은 구분되어 있다. 세계적인 부자이면서 자선가인 워렌 버핏을 자신이 만일 미국이 아닌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다면 야채장수를 했을 것이라고 한다. 오늘의 부는 자유와 경쟁이 보장된 미국에 태어났기에 가능했기에 자기 소득의 1.2%만 자신을 위해 소비하고 나머지는 사회에 기부한다. 우리의 역할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 태어나고 싶다는 의지와 관계없이 노력해야 한다. 감정과 환경에 지배받기 보다는 의지적이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위대한 삶의 기술이다.

오늘의 역사: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바르트 (1886- 1968) 출생

바젤에서 태어났다. 바르트는 마을 공장의 노동조합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15년에는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나타난 근대 신학 전체의 무력함에 대한 실망과 블룸하르트 부자의 영향으로 그는 성서의 세계에 더 한층 깊게 빠지고, 거기에 현대에도 이야기하는 살아있는 신의 말씀을 발견했다. 그는 점차로 ‘종교사회주의’운동에서 멀어져서, 바울의 ‘로마서’ 강해를 19년에 발표했다. 그것은 더욱 근본적으로 고쳐 써서, 22년에 재판되었는데, 이것이 세계대전 후의 신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쳐서, 결국 ‘변증법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새로운 신학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33년 히틀러의 독일제국 재상 취임을 계기로 시작된 교회에 대한 나치스 정권의 간섭 속에서, 바르트는 일찍이 스위스 국적을 가진 채로 ‘고백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교회투쟁’에 참가하고, 그 이론적 지도자가 되었다. 33년 6월에 소책자 ‘오늘의 신학적 실존’을 발표했는데 이는 교회투쟁의 기상나팔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았으며, 루터와 칼뱅 이후 최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라고 불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