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의 시사 인문학 365일] 6월 2일 아는 것과 행동의 차이

2020-06-02     파이낸셜리뷰

성공의 비결은 그 지망하는 것이 일정하고 변하지 않는 데에 있다.

- 영국정치가 벤자민 디즈레일리 -

[파이낸셜리뷰] 인간의 삶에는 아는 것과 행동하는 두 말이 이끈다. 지성의 말은 갓 태어난 새끼말로 한 발짝 걷기도 어렵지만 행동의 말은 얼룩말로 힘차게 나간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도 전혀 다릅니다. 알 때는 머릿속과 입에서 맴돌지만 깨달을 때는 행동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치열한 삶의 경험과 진지한 사색 끝에 얻는 삶의 진주입니다. 사실 멈칫 거리는 사자보다 한 방 쏘는 벌이 더 위협적입니다. “사람이 지혜가 모자라서 일에 실패하는 적은 거의 없다. 사람에게 부족한 것은 성실이다. 성실하면 지혜도 생긴다.” 디즈레일리의 말입니다. 플라톤도 실행을 중시합니다.“교육이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거나 주입하는 일이 아니라 영혼을 전향케 하는 기술이다. 시선을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향하기 위해서는 몸 전체를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지적 눈을 진리의 세계로 가상의 세계에서 진상의 세계로 돌릴 수 있기 위해서는 영혼을 180도 전향해야 한다.” 플라톤의 교육관인 일단 영혼의 전향이 이루어진 다음에 영혼을 서서히 빛에 적응시키면서 동굴 밖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올바른 교육이 되기 위해서 학교만의 책임으로 미룰 수 없습니다. 먼저 가정에서 따뜻한 울타리를 느끼고 사회성을 함께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교육은 사랑이 넘치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성교육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자기 주도적 학습, 주체적 학습,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공감하고 자유로운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 함에도 우리의 교육 풍토는 입시 위주에 올인 되어 올바른 사회인으로 키우기 어렵습니다. 교육을 머리와 가슴으로 각각 아는 모순의 파노라마가 두렵게 다가옵니다.

오늘의 역사: 1778 프랑스 사상가 루소 (1712-1778) 별세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불우한 유아기를 보냈다.

루소는 프랑스의 혁명의 사상적 지주이자 계몽사상가, 교육론자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철학적 입장은 물질과 정신이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불멸설과 이원론을 믿었다.

루소는 “신이 만물을 창조할 때에는 모든 것이 선하지만 인간의 손에 건네지면 타락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깨뜨리고 일그러뜨린다.”며 아동을 자연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적 관념을 중시하고 봉건적 전제 지배를 격렬하게 공격하고 시민의 자유를 강조하기도 했다.

인간은 출신에 관계없이 평등하고, 불평등은 사유재산에 기인하고 소유를 인정하고, 노동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사회계약론은 홉스와는 달리, 인간의 자연의 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우정과 조화가 지배하고 자연 상태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잔 자크 루소와 화가 밀레는 우정 이야기 하나.

어느 날 생활이 곤궁해진 밀레가 고민을 하자 루소가 말했다.

“자네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이 생겼네.”루소는 밀레의 그림을 사면서 이렇게 말을 하고 300 프랑을 건넸다. 당시 입에 풀칠을 하기가 어려웠던 밀레에게 그 돈은 천금보다 귀한 돈으로 자부심과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몇 년 후 밀레의 작품이 인정을 받게 되어 친구를 찾아가 작품을 되팔아 주겠다고 루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루소가 팔아주겠다고 가져간 그림이 루소의 방에 걸려있었다. 밀레는 그 때 친구 루소의 깊은 배려의 마음을 알고 고마움의 눈물을 글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