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리뷰] 이희호 여사 서거, 남긴 족적 ‘셋’

김대중 동반자이자 민주주의 투사로서 여성 인권 향상 위한 여성운동가로서 남북의 평화 안착을 위한 평화메신저로

2019-06-11     이정우 기자

[파이낸셜리뷰=이정우 기자] 10일 소천한 이희호 여사는 ‘민주’, ‘여성’, ‘평화’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고인의 삶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 여성의 인권 향상을 위해서, 남북의 평화를 위해 살다갔기 때문이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부인 삶도 있었지만 인간 ‘이희호’로서 이 여사의 삶은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한몸 바친 삶이었다는 평가다.

이런 이유로 이 여사의 소천 소식은 우리 국민에게는 애통할 소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여사가 뿌려놓은 작은 씨앗은 이제 큰 나무가 돼 우리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 버팀목으로, 여성인권의 버팀목으로, 남북 평화의 버팀목으로 그렇게 우리 곁에 늘 서 있는 사람이 이 여사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큰 족적을 남긴 이 여사가 지난 10일 오후 11시 37분 연세세브란스 병원에서 소천했다.

지난

족적 1.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 여사의 족적 중 하나가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삶이었다는 점이다. 1922년 9월 서울에서 6남2녀의 넷째이자 맏딸로 태어난 이 여사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 부모 밑에서 모태부터 기독교 신앙 속에 자라났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 간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1962년이다. 야당 정치인이던 김 전 대통령과 결혼을 하면서부터 이 여사의 삶은 ‘여성운동가’에서 ‘민주주의 투사’로 바뀌었다.

물론 당시 주변에서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했지만 이 여사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결혼 후에도 여성운동을 꾸준하게 이어져왔지만 주로 민주주의 투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박정의 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탄압은 야당 정치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더욱 힘들게 했고, 이 여사를 비롯한 가족은 그 고통 속에서 버텨야 했다.

무엇보다 1970년 김 전 대통령이 신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후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패배를 하자 박정희 독재정권은 더욱 탄압을 하게 됐다.

1972년 박정희 독재정권은 ‘10월 유신’을 단행했고, 이에 김 전 대통령은 국외 망명을 택하게 됐다. 이때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에게 “더 강한 투쟁을 하라”고 편지로 독려를 했다. 한번도 김 전 대통령에게 민주화 투쟁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 일이 없다.

1973년 8월 김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 당하자 남편의 생사를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6일은 그야말로 죽음의 터널을 지나온 것처럼 일생에서 견디기 힘든 날이었다고 소회를 훗날 밝히기도 했다.

1976년 김대중·문익환·윤보선·함세웅 등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돼 박정희 유신정권을 비판한 3·1민주구국선언 사건 직후 이 여사는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게 됐는데 “민주회복을 위해 많은 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이곳을 거쳐 가는데 나도 동참할 수 있게 돼 대단히 영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투옥되면서 2년 10개월 동안 석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로 감옥에 갇힌 대학생들의 가족들과 함께 ‘양심수가족협의회’를 만들었다.

유신체제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을 하자 종말을 고하게 됐다.

하지만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 학살을 저지르면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 큰아들 김홍일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면서 파킨슨병을 얻어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사형까지 언도돼 죽을 날만 가다리는 신세가 됐고, 결국 미국 망명길로 오르게 됐다.

고통의 기나긴 역사를 뒤로 하고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1997년 대선 승리를 얻어냈다. 김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는 이 여사가 뒤에 있엇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87년

족적 2. 여성 인권 향상 위해서

이 여사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높은 교육을 받았다. 서울대 사범대 등을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면서 대한여자청년단을 만들었다. 이어 1952년 당시 여성계 지도자였던 황신덕, 박순천, 이태영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4년 동안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서른 여섯에 귀국, 1958년 겨울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총무로 발탁됐다.

김 전 대통령과 결혼을 한 후에도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을 지내면서 계속해서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여성운동가의 삶을 그만두게 됐다.

하지만 결혼 직후 대문 옆에 ‘이희호’ ‘김대중’ 문패가 나란히 걸리면서 여성운동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1997년 김 전 대통령이 대선에 당선되면서 국민의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여성 장차관 숫자가 크게 늘어났고, 여성가족부가 탄생하게 됐는데 이 모든 것이 이 여사의 끊임없어 여성운동 때문이라는 평가다.

지난해 미투 운동이 벌어졌을 때 피해자들을 향해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갔으면 좋겠다”고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2000년

족적 3.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한걸음

이 여사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 동행했다.

당시 장상 이화여대 총장, 성인숙 청와대 제2부속실장 등과 함께 북측 여성 인사들과 남북 여성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지난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이 여사는 정부에 방북 신청을 했고, 당시 상주였던 김정은 현 국무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2014년 10월 청와대를 방문해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게 북한 아동 돕기를 위해 방북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2015년 8월 이 여사는 북한을 3박4일 일정으로 방문했고 당시 북한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우리 인민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원천리 평양을 방문한 이희호 여사에게서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위해 애쓰는 진심을 알 수 있었고 여생을 통일의 길에 바치려는 그의 남다른 열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이 여사의 소천은 경색된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해빙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북한이 조문단을 보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