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국의 나의 역사, 자서전을 쓰다] 9 돈보다 값진 ‘삶’을 물려주기

2020-11-21     김대국
[파이낸셜리뷰] 자기 역사를 쓰지 않으면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언제부터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을까? 자서전이란 장르의 시작은 적어도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2천년이 넘는 계보를 가진다. 요세푸스는 로마에 대해 일으킨 반란이 실패하자 투항하여 책 쓰는 일에 몰두했다. 그만큼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다. 일반인들이 독자를 만나기 위해선 책이라는 진입 장벽이 높은 매체밖엔 없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와서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같은 소셜미디어로 개인이 작가가 되는 기회가 활짝 열렸다. 최근 글쓰기와 자서전 쓰기가 유행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랜 기간 눌려 있던 욕구가 분출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본 도쿄 릿쿄대학에서 운영하는 ‘세컨드 스테이지 대학’에서 2008년부터 자서전 쓰기 수업을 맡아 지도해왔다. 그 수업의 결과물을 토대로 쓴 책이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이다. 수강생들이 직접 쓴 자서전 사례들이 담겨있어 생동감을 느낀다. 릿쿄대학의 강좌는 50살 이상만 입학할 수 있는 자격제한이 있는데 이유는 이들이 인생의 후반기를 준비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누구나 한 번은 맞닥뜨리게 되는 은퇴, 생소하고 새로운 단계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다치바나는 말하길 “과거를 총괄해보는 중간 점검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을 재확인”하는 자서전 쓰기가 그 답이라 말한다. 지금 자서전을 써야 하는 급박한 이유는 따로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병이다. 자서전을 쓰지 않은 채로 죽거나 치매 같은 중병에 걸리면 나만 아는 내 생애사(史)는 영영 사라져 버린다. 이를 두고 다치바나는“한 인간이 죽으면 그 사람의 뇌가 담당하던 장대한 세계 기억 네트워크의 해당 부분이 소멸하고 만다.”고 표현한다. 이 말이 너무 거창하게 느껴지면 자녀나 가족, 친구들이 내 삶의 이야기를 간과해버리는 슬픔이다.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기억”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부모는 자녀에게 유전자를 물려주는 전달자요, 자녀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다. 자녀들 역시 부모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선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나 자신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막상 자서전을 쓰려고 하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이때 ‘자기 역사 연표’ 만들어 자신의 삶에 일어났던 다양한 일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글은 갈등이나 어린 시절 부모와 겪은 심각한 불화의 상처를 꿰매준다. 글을 쓸 때 프로이트가 말하는 마음속에 숨은 트라우마도 치유된다. 자서전은 특별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 발전해 왔다,’ 문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발전해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은 로마 제국의 쇠퇴기에 등장하고, 몽테뉴의 ‘수상록’은 중세가 저물고 르네상스기에 접어드는 새로운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때에 나왔고, 루소의 ‘고백론’은 절대왕정이 붕괴되고 부르주아 계급이 떠오르면서 자아를 탐구하는 시대에 나왔다,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자서전은 다다오가 오사카 도톤보리 헌책방에서 르코르뷔지에의 책을 발견할 때 우연이지만 기적 같이 가슴을 후벼 파기에 만들어졌다. 삶의 큰 변곡점이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나의 역사를 풀어보는 것은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글쓰기에서는 ‘어떻게 쓰는가’에 못지않게 ‘왜 쓰는가’가 중요하다. 글쓰기의 철학과 자세는 문장의 내용과 함께 형식까지 지배하기 때문이다. 작가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쓰기의 동기는 밝혔다.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로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등 네 가지를 들면서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어떤 유명한 작가도 일피휘지(一筆揮之), 펜을 쉬지 않고 막힘없이 써내려가기가 쉽지 않다 모든 이들의 바람일 뿐이다. 일단 글을 쓰자. 내 생각을 온전히 담아내는 시작이자 종착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