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香(심향 강상빈 박사)의 생애와 사상 3편

2019-12-20     강상빈 박사
[파이낸셜리뷰] (3) 서울로 이사와 종암국민학교에 입학 우리 식구가 살고 있는 서울사대부속중학교 관사는 서울사대 교정 내 아름다운 뒷동산에 위치하였다. 아담한 한옥 5채 가옥에 사대부중 교사 가정 5세대가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특히 사택 바로 앞에 서울종암국민학교가 위치하고 있어 등교하기가 참으로 편했다. 이사 온 이듬해 초등학교에 입학 했다. 이 때 부터는 기억이 난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친구와 싸우다가 똥을 밟았던 일, 자상한 담임선생님들, 옆 짝궁 친구들도 다 생각난다. 그 당시는 학원이라는 것이 없어 방과 후에는 놀기에 정신이 없었다. 자치기, 딱지치기, 구슬놀이, 줄넘기놀이, 땅따먹기, 연필 따먹기, 마석놀이, 팽이 돌리기, 굴렁쇠 굴리기 놀이, 썰매타기, 눈사람 만들기, 눈싸움하기, 윷놀이, 아카시아 꽃 따먹기, 벚찌 따먹기, 알 밤 줍기, 새총 쏘기, 쥐불놀이, 축구 공 차기, 철봉하기 등 참으로 재미있는 놀이가 많았다. 그 당시 종암국민학교 학생수가 8,000명이나 되어 세계 최대 학생 수를 자랑하는 학교가 되었다. 피임제도, 산하제한 제도가 없던 시대라 아이들이 많이 탄생해서 그런지 학생 수에 비해 교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콩나물시루 같은 조그마한 교실에 100명 이상이 모여 수업을 하였었다. 그 당시(1954-60) 우리나라 경제가 엄청 어려운 시절로 학교 증설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근홍 교장 선생님과 강계희 교감선생님의 주도로 ‘전교생 공병 폐지 모으기 운동’을 벌려 매일 등교 시 8,000여명의 학생들의 양손에는 공병, 빈 박스, 폐지 등이 들려져 있었다, 이를 꾸준히 3년간 모은 결과 인근에 홍파국민학교를 세우는 기금을 조성하게 되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과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협동의 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특별히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3학년 때 여자담임선생님(윤영자 선생님)이 참으로 미인이셨다. 그래서 가끔 군인아저씨와 멋진 아저씨들이 학교로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 왠지 만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질투심이 생기곤 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록 어린 시절로 뭔지 잘 모르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선생님을 빼앗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나이지만 이성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있었던 같다는 사실을 부정 할 수 없는가 보다. 1962년 6학년 때는 최인규내무장관의 동생인 최재규 선생님이 우리 6학년 10반 담임선생님이었다, 6학년 학생 수가 너무 많아 한반에 100여명으로 20반까지 있었다.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놀림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우리 학교 학생들을 보고 “거지 때들아!“라고 부르기도 했다. 참으로 가난한 시절 3 끼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아서 ”거지 때들아 !“라고 부른 것 같다. 그런데 우리 담임선생임은 형님이 장관으로 높으신 분이셔서 그런지 부티가 나셨다. 예쁜 여성분이 맛있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로 찾아오시고 많이 따라다니시는 것을 보았다. 반장이었던 나는 선생님 심부름을 하면서 담임선생님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3학년 여선생님 때와는 달리 질투심은 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