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香(심향 강상빈 박사)의 생애와 사상 23편
2020-05-27 강상빈 박사
⑦ 농촌살리기 운동 영농교육, 귀농교육, 한국자연농업협회교육
‘돌아오는 복지 농촌, 참여하는 도시인들’의 책이 발간되자 일부 일간지에 해운업계 사장이 농촌살리기 운동에 나섰다는 기사가 나오자, 각종 매스컴으로 부터 인터뷰 취재가 쇄도하였다, 1998년 10월 1일 10시 CBS 방송의 이명희, 고영두 사회가 진행하는 ‘흙에서 살리라’라는 생방송에 출연한 후에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나의 사무실로 찾아와 농촌복지 건설에 후원하고 싶다고 했다. 전 재산을 농촌사회복지 사업에 헌납하겠다는 사람, 수백만평 땅을 기증하겠다는 사람, 건설장비 일체를 무상지원 하겠다는 건설업체 대표 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제안을 모두 정중히 거절하였다.
나의 책을 읽어본 가까운 친구의 말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수고했다’라는 말은 전혀 하지 않고 너는 이중인격자 인 것 같다. 병아리도 한 마리 키워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농촌살리기를 한다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친구란 덕담을 하는 것이 당연한데,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서운하게 들렸다.
며칠을 고심하던 중 갑자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 이 친구가 진정한 참 친구이구나. 말과 글로는 얼마든지 이상적인 표현을 번드르르 하게 할 수 있지만,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위선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친구의 진정한 충고가 처음에는 섭섭하게 들렸지만, 나에게 확실한 가치관과 목표 속에 강한 실천력을 갖게 하여 나의 인생의 대 변혁을 하는 감사한 메시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98. 9. 17 나의 50주년 생일을 맞이하여 충남 서산 지곡면 장현리 산56-1에 ‘한누리농장’이라는 이름으로 유기농장 건설 개척의 첫 삽을 뜨게 되었다.
⑧ 대한민국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후배가 간곡히 부탁하여 마련하게 된 서산 임야는 공작포란(孔雀抱卵)형으로 으뜸 새가 알을 품고 있는 엄마 품과 같이 아늑한 명당이라고 생각한다. 1983년 5월 고교후배로부터 임야를 팔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주변에 소개를 하였으나, 그 당시 교통편이 매우 열악한 오지로 모두들 관심이 없었다. 후배는 미국 여비를 급히 마련하여야 하니 나에게 꼭 사주기를 간곡히 애청하는 것 이었다. 마침 우리 부모님의 고향은 평북 창성인데, 모든 땅을 이북정권에 빼앗겨 남하하여 땅이 없는 형편이라, 선산용으로 임야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와 형님께 선산을 마련하는 것이 어떠냐고 상의를 드리게 되었다.
두 분 모두 좋은 생각이 라고 말씀하셔서, 그 다음날 휴가를 얻어 새벽에 동생과 함께 서산을 찾아갔다. 참으로 멀었다, 비포장도로를 다니려니 시간이 참으로 많이 걸렸다. 강북구 수유리에서 승용차로 왕복 26시간이나 걸렸다. 아버님께 땅이 선산으로 쓰기에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구입비용을 달라고 하니, 아버님께서는 교육자인 내가 6남매 키우는데 무슨 돈이 있느냐며 난색을 표하신다. 형님도 마찬가지로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감사한 마음이 든다. 만일 그 당시 아버님과 형님의 돈으로 산을 구입하였더라면, 어떻게 내가 내 마음대로 한누리 농장을 개척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버님께 구입자금 일부를 빌려 임야를 구입하였다.
1986년 5월 미국에 출장을 가게 되어 lA에 거주하고 있는 고교동창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하는데, 모두 나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땅 부자 갑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소문이 났는냐고 의아해 하며 물으니, 내가 임야를 구입한 2년 후인 1985년부터 서산에 땅 투기 붐이 일어나 20배 이상 가격이 폭등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선산용으로 구입 한 것이라 부동산 투기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이 오르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한편 나는. 90년 초부터 농촌살리기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땅을 구입하기위해 수도권 지역(용인, 양평, 이천, 여주, 안성 등) 수많은 지역을 찾아가보았지만, 내 마음에 드는 땅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깨달음이 왔다. 이미 좋은 땅이 있는데 왜 굳이 다른 땅을 찾고 있는지? 참으로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서산에 좋은 땅이 예비 되었는데 왜 쓸데없이 다른 지역을 찾고 있는지?를 깊게 반성하고 서산 땅 임야를 개척하기로 결심하고 1997년에 주변 땅 전답들을 추가로 구입하게 되었다.
거주할 주택을 마련하려고 인근 농가 빈집을 알아보았으나, 자기 땅에 집을 직접 짓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 서산시청 산림과에 산림형질 변경 신청을 하였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이 특별한 이유 없이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다. 급행료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지만, 뇌물을 주면서까지 농촌살리기 모델을 만들 수는 없기에 충남 도청 과장으로 근무하는 사촌동생에게 상의를 하니 “형 막걸리 값 조금 드리세요‘라고 한다. 나는 ’내가 농촌살리기 운동의 시범 모델을 만들려고 하는데,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어야 인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다녀냐 하냐?”고 큰 소리를 치게 되었다. 이에 “형, 알았시유, 마음 푸시유, 제가 조치 해 드릴게유” 한다. 그 후 1시간 지나 서산시 산림과 형질변경 담당자로 부터 전화가 왔다. “딴 뜻은 없구유, 추석 지나 바로 해드릴게유, 1,000평 다 해드릴 수 없구유 반 만 해드릴게유”라고 한다. 주변에 알아보니 막걸리 값 주면 1,000평 다해 주겠다는 뜻이란다. 그 당시 만에도 공무원들 모두 촌지를 주지 않으면 민원처리를 제대로 해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사춘 동생의 입김이 없었다면 산림형질변경은 어려웠을 것이었다. 돈과 빽이 난무한 시절이었다.